윤석열 대통령이 새해 첫 순방지였던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투자를 약속받고 귀국한 지 열흘이 지났다. UAE는 국부펀드를 통해 한국에 300억 달러(약 37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투자를 예고했고 100여개의 민간기업으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에서 개별 기업들이 체결한 양해각서(MOU)는 48건에 이른다. 에너지·방산·바이오·스마트팜 등 분야도 다양하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양국 간 투자 합의에 대한 후속 조치 마련에 나서는 등 UAE 순방 성과가 민생 효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열의를 보이고 있다.
정부에서는 이번 순방이 특히 경제에 방점을 둔 만큼 우리 기업들이 UAE를 넘어 중동 전체로 진출할 활로를 개척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UAE에서 확보한 투자 성과는 시작일 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교류가 따르지 않는다면 300억 달러의 투자와 각종 MOU를 제대로 실행에 옮기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에 서울경제는 정만기 무역협회 부회장, 김태호 KOTRA 경제통상협력본부장, 박인식 한국수력원자력 수출사업본부장, 강성민 우듬지팜 대표를 초청해 좌담회를 열고 윤석열 정부의 UAE 순방 성과와 향후 우리나라가 중동과 미래 산업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했다.
◇UAE 탈석유·韓 정보기술(IT)의 결합=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이 새해 첫 순방지로 UAE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산업’에 있다고 분석했다. 정 부회장은 “세계은행(WB)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3.0%에서 1.7%로 하향 조정할 정도로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막대한 오일머니를 축적한 중동 국가는 ‘포스트 오일 시대’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은 “그중 UAE는 2000년대 들어 탈석유, 산업 다각화를 본격 추진하면서 항공·물류·유통·통신·금융 등 자본 집약적 산업을 육성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경기 변동, 자국민 우대 정책 등으로 산업 다각화에 한계가 있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제조업·원전·수소 등 기술 집약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춘 한국이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지식 기반 산업으로의 전환이 더딘 UAE는 이번 협력을 계기로 산업 다각화를 빠르게 추진할 수 있고 수출 둔화세에 접어든 한국으로서는 중동 시장에 진출할 강력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어 서로에 ‘윈윈’ 효과인 것이다.
전 세계적인 탄소 중립 흐름에 발맞춰 UAE가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2009년 최초로 UAE 바라카 원전 수주에 성공했으며 윤 대통령은 이번 순방 때 바라카 원전을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박 본부장은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이 양국의 원전 협력 사업을 가리켜 전 세계적인 모범이라고 치켜세운 것을 봐도 한국에 적극 투자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바라카 원전 협력의 경험을 토대로 양국이 동반 성장할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사절단 기업 만족도 높아=윤 대통령의 UAE 순방 성과가 업종과 기업의 규모에 상관없이 고루 돌아갈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김 본부장은 “KOTRA는 경제 사절단 참여 기업 중 중소·중견기업 36개사와 현지 바이어들 간의 수출상담회를 개최했는데 상담 건수가 250여 건에 달했으며 경제적 성과는 1100만 달러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이어 “수출상담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기술력과 수출 역량을 갖췄지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며 “대통령이 직접 UAE를 방문한 만큼 그 후방 효과로 현지 비즈니스를 더 가속화해 향후 6개월~1년 내로 우리 기업들의 중동 수출 사례가 많아질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스마트팜 기업인 농업회사법인 우듬지팜은 UAE 현지 농업 기업 엘리트아그로와 1000만 달러 규모의 스마트팜 설치·운영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시설 규모 3.3헥타르(㏊)의 스마트팜과 함께 80만 달러 규모의 식품 가공 공장도 설치한다. 강 대표는 “중동 지역은 여름 평균기온이 섭씨 40도를 넘어가기 때문에 일반 온실에서는 작물 재배가 어렵지만 우듬지팜이 보유한 이중 공조 시스템으로는 사계절 모두 재배가 가능하다”며 “이러한 기술력을 중동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순방 기간 진행된 한·UAE 비즈니스포럼에서는 에너지, 방산, 수소, 모빌리티, 바이오, 디지털 전환, 스마트팜 등 다양한 분야에서 MOU가 체결됐다. 한국무역협회가 UAE 경제 사절단 참여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92.3%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고 답했으며 83.1%가 구체적인 후속 조치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민관 협조로 맞춤형 후속 조치 필요=UAE에서 체결된 계약과 투자 약속이 곧장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순방 성과가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기업과의 긴밀한 협조가 핵심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 부회장은 “사람들이 자주 만나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사업 기회도 창출된다는 판단 아래 한국무역협회는 ‘한·UAE 경제협력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UAE 경제협력위원회는 △에너지·인프라 △항공우주 △보건·의료 △미래 기술 등 4개 분과위원회를 운영할 계획이며 UAE 정부와의 미팅 및 국부펀드와의 네트워킹 구축 등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김 본부장 역시 “현지에서 개최한 수출상담회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참여 기업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MOU 진행 현황을 모니터링할 예정”이라며 “그 과정에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정부에 적극 건의하고 현지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무역관을 통해 이를 전달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UAE 순방의 후속 조치를 위해 2월 1일부로 경제협력지원팀을 출범할 예정이다. 형식적인 지원이 아닌 개별 기업에 걸맞은 ‘맞춤형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강 대표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기업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 보니 정부나 공공기관, 경제 단체 차원에서 운영하는 위원회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할 우려도 있다”면서 “스마트팜·방산·바이오 등 업종별로 구체적인 애로 사항을 듣고 중동 진출에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줄 때 진정한 후속 조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전·스마트팜·헬스케어로 협력 확대=UAE를 포함한 중동 국가에서 탈석유 정책을 시행하며 한국과의 협력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존에는 석유·가스 분야를 중심으로 단순 무역 위주의 협력이 진행됐다면 앞으로는 제조업을 포함해 원전·스마트팜·바이오·디지털·헬스케어 등 업종을 불문하고 전략적 제휴, 직접 투자, 제3국 공동 진출 등을 함께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 본부장은 “원전으로 맺어진 인연은 100년 동안 이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건설에 10년, 운영하는 데 60년, 후속 조치에 30년 정도 걸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00년에 걸쳐 양국 관계를 점차 강화하는 동안 소형모듈원자로(SMR)·청정에너지·수소 등 관련 에너지 사업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할 기회가 창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본부장은 “지금까지 UAE가 주로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업종에서 제조업을 추진해왔다면 앞으로는 항공우주·자동차·식품 등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할 예정인데 이러한 분야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며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현지에 진출하도록 지원하고 테스트베드로 삼아 이들을 육성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향후 재생에너지 분야는 자원을 얼마나 풍부하게 갖고 있는지보다는 기술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가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은 수소, 태양광,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해 중동과 협력을 넓혀가는 데 유리하다”고 전망했다.
◇금융 지원·인적 자원 강화 절실=단순히 특정 산업의 진출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정 부회장은 “중동 지역에서 제조업을 육성한다고는 하지만 근로자는 대부분 저임금을 받는 외국인인 경우가 많다 보니 기술 축적에 어려움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해 “제조업이나 지식 기반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춘 인력이 많아야 하고 이들이 정당한 급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중동에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구축하는 프로그램이나 교육 훈련에 우리 기업들이 진출하거나 현지 대학·의료기관 등과도 협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재정적인 지원 규모를 늘리고 적용 범위를 유연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각종 엔지니어링 사업이나 스마트시티 구축, 원전, 플랜트 등 여러 분야에서 기업들이 역량은 갖췄지만 실제로 현지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수출을 진행하기 앞서 재정적인 요소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