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필수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의료 분쟁 발생 시 의료인의 법적·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응급수술이나 어려운 수술 등에 대해 공공 정책 수가를 도입해 보상을 강화한다. 고의가 아닌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인에 대한 형사처벌 면제도 거론되고 있다. 또 현행 70%인 일부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금액의 국가 분담 비율을 내년에 높인다. 수가 체계에도 메스를 대 검체·영상 검사 종별 가산을 일괄 폐지하고 확보한 재정을 외과계 수술과 입원 등에 집중 투입한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3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 같은 내용의 필수 의료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은 의료계와의 논의를 거쳐 지난해 12월 공청회에서 공개했던 안을 보완해 최종 확정한 것이다. 조 장관은 “필수 의료 기반 강화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에 대한 접근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책 방향이며 발전시켜 나가야 할 국정과제”라며 “이번 대책은 첫걸음이며 앞으로도 추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복지부가 이날 발표한 필수 의료 지원 대책 중 가장 눈에 띄는 방안은 의료인의 의료사고 부담 완화다. 생명이 달린 진료를 하는 필수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의료인이 형사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종사할 수 있도록 의료분쟁조정법 개정, 특례법 제정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임인택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해당 사안은) 의료인이 안전한 환경에서 의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필수 의료, 특히 기피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검토됐다”며 “적용 행위과 대상, 입법 방식이나 스케줄은 이후 관계 부처와 협의를 거쳐서 구체화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는 고난도·고위험 수술이 많은 필수 의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의료 과오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되면 필수 의료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고 특례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해왔다. 아울러 의료계는 필수 의료를 제공받은 환자의 사망·상해 의료사고 발생 시 필수 의료 종사자에 대해서는 검찰이 공소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료계는 복지부의 특례 추진 방침에 반색했지만 환자 단체는 크게 반발했다. 최성철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사는 “이번 대책은 지나치게 의료 공급자 입장만 생각한 대책”이라며 “지금도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극히 드물다”고 지적했다.
중증·응급·분만·소아과 등 필수 의료 진료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공공 정책 수가’도 도입한다. 공공 정책 수가는 현행 행위별 수가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공공성이 있는 의료 분야에 적용하는 새로운 건강보험 보상 체계다. 공휴일 야간 응급수술·시술에 대한 수가 가산율을 현행 100%에서 150~200%로 확대한다. 또 분만 의료기관에 대해 의료 자원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지역 수가’와 의료사고 예방 등 안전한 분만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안전 정책 수가’를 적용한다. 이에 따라 현재 분만 수가에 더해 지역별 시설·인력 기준을 충족한 병원에 지역 수가 100%가 가산되며 분만 담당 의사에게는 안전 정책 수가 100%가 더해진다.
고난도·고위험 수술에 대한 보상도 강화한다. 재원은 의료기관 유형에 따라 가산율을 차등하는 종별 가산 제도를 정비해 마련한다. 현재 15~30%인 수술·처치·기능검사 등의 종별 가산율을 의료기관 유형별로 일괄 15%포인트 삭감하고 검체·영상검사의 경우 종별 가산제 자체를 폐지한다. 가산제 개편으로 확보된 재정은 외과계 수술과 입원 등 영상검사 대비 저평가 분야에 대한 상대 가치 보상 강화에 활용한다. 고난도·고위험 수술 및 시술 행위에 대해서는 업무 강도와 자원 투입 수준을 반영, 수가 기준을 세분화해 추가 보상한다. 예를 들어 대동맥박리는 치료하지 않을 경우 24시간 이내 25%가 사망하므로 팀 단위 접근 필요성을 고려해 별도 수술 수가를 신설한다. 소아 심장 기형 수술은 고난도 수술 방법인 동맥 전환 수술법 적용 시 추가 보상한다.
필수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한 기반 확충 대책도 내놓았다. 우선 응급 진료부터 수술 등 최종 치료까지 한 병원에서 가능하도록 현재 40곳인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중증 응급 진료 역량을 갖춘 중증응급의료센터로 개편하고 규모도 50∼60곳 안팎으로 늘릴 예정이다. 특히 고위험 심뇌혈관 질환자의 골든타임 내 고난도 수술이 상시 가능하도록 권역심뇌혈관센터의 기능을 전문 치료 중심으로 재편한다.
주요 응급 질환에 대한 여러 병원 간 순환 당직 체계도 시범적으로 도입된다. 질환별로 수술이 가능한 전문의가 병원당 1∼2명인 경우 매일 당직은 사실상 어려워 야간·휴일에는 공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진료 및 소아 진료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소아암 지방 거점 병원 5곳을 신규로 지정해 육성하고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늘리는 등 소아 진료 기반도 확충한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대책에 대해 “필수 의료 수가 인상은 긍정적이지만 근본 대책은 되지 못한다”며 “필수 의료 외 행위 수를 늘리고 비급여로 수익을 올리기 더 쉬운 상황에서 의료기관이 수가 인상만으로 필수 의료를 강화할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