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따른 피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법원이 우리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박진수 부장판사)은 7일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63) 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티탄 씨)에게 3000만 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 손해금을 지급하라’는 게 판결 요지다.
티탄 씨는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2월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7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에서 가족들을 잃고 자신도 총격을 입었다며 2020년 4월 3000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우리 정부는 베트콩이 한국군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어 단지 한국 군복을 입고 베트남어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군이 가해자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우리 군이 민간인을 살해했더라도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베트남전 특성상 정당행위라는 주장도 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오히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류진성 씨, 당시 마을 민병대원이던 베트남인 등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한 결과를 바탕으로 티탄 씨의 주장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당시 해병 제2여단 1중대 군인들이 원고 집에 이르러 실탄과 총으로 위협하며 원고 가족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했다”며 “이로 인해 원고 가족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원고 등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군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곳으로 강제로 모이게 한 뒤 그곳에서 총으로 사살한 사실도 인정할 수 있다”며 “이 같은 행위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특히 베트남과 한국·미국 간의 약정서 등에 따라 베트남인이 한국 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우리 정부 주장에 대해서도 “군사 당국 및 기관 간의 약정서는 합의에 불과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약정서 등이 베트남 국민 개인인 원고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청구권을 막는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사건 소멸시효가 만료됐다는 정부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민법에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와 가해자가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소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거나 채권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큰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된다.
재판부는 △피해 정도 △배상의 지연 △물가 △통화 가치의 변화 등을 고려해 정부가 티탄 씨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를 4000만 원으로 정했다. 하지만 티탄 씨의 청구 금액이 3100만 원이라 그 범위 한도에서 배상금이 인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