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바이오

'불펜 약사'를 아시나요…제약사 편법 내모는 구시대 약사법

■“GMP 첨단시설, 차라리 엔지니어 필요”

▶ 불펜 약사 =은퇴 고령약사 편법채용

"제조·품질관리" 약공장 의무채용

바이오 등 급성장…구인난만 불러

1953년 제정된 약사법에 발목

중소형사·지방선 채용 힘들고

뽑아도 정착 기대하기 어려워

“사람이 직접 약 만드는 일 없다”

일각선 안전 문제 들어 반대도


제약·바이오 산업 급성장과 함께 약사들이 ‘귀하신 몸’이 되면서 전국 제약 공장에 약사가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한 약사법이 시대착오라는 지적이 나온다. 자동화·체계화된 현대 의약품 제조 시설에 수십 년 전 제정된 약사법에 따라 약사가 상주하면서 제조 과정을 관리·감독할 근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제약 공장이 지방에 있기 때문에 상주할 약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일부 제약사들은 은퇴한 약사들을 고용해 서류에 서명만 시키는 이른바 ‘불펜 약사’를 활용하기도 한다. 야구 경기에서 불펜에서 몸을 풀다 경기 중간에 등판하는 투수들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지방에 제약 공장을 가진 제약사 대부분이 공장에서 근무하는 약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약사를 채용하기도 어렵지만 근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는 경우도 많아 구인난이 반복되고 있다.



현행 약사법에는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을 불문하고 제약 공장에 제조관리자로서 약사가 근무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법은 약 도매상에도 약사가 근무하도록 강제한다. 업계에 따르면 이 규정은 1953년 약사법이 제정될 때부터 존재해 무려 70년간 유지돼왔다. 당시 이 같은 법을 도입한 취지는 제약사 제조 공장의 품질을 전문 지식을 갖춘 약사가 관리해야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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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0년이 지난 현재 국내 제약 업계 제조 공장 대부분은 자동화돼 있다. 다른 제조업에 비해 규정이 깐깐한 '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를 충족하는 첨단 시설이 대부분이다. 굳이 약사가 제조와 품질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업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람이 직접 챙겨야 하는 원료 교체나 육안으로 약을 보며 하는 검사 업무 등 외에는 모두 자동화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옛날처럼 사람이 직접 약을 만드는 일은 없기 때문에 약사보다 엔지니어가 오히려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약사법을 따르려면 무조건 약사를 고용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격증을 가진 약사가 지방의 제약 공장에서 제조관리자로 근무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A제약사 관계자는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오지 않으려 한다"며 "어렵사리 뽑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B제약사 관계자는 “약사들은 서울·수도권 근무 선호가 강해 숙식 제공에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지방 공장으로 모셔오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필수 서류에 서명만 시키는 불펜 약사를 암암리에 고용하는 곳들이 꽤 있다. C제약사 관계자는 "업계에서 불펜 약사로 불리는 이들 고령 약사는 상근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나와 서류에 사인을 한다"며 “그나마 제약사는 약사 면허 대여 등 불법행위는 없지만 약 도매 업체에서는 면허 빌려주기 등이 횡행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D제약사 관계자는 “제조 공정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70년간 이어진 약사법이 제약 업계를 편법·불법으로 내몰고 있다”며 “산업 현장의 사정을 고려해 관련법을 손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제약·바이오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약사는 더욱 귀한 몸이 됐다. 약사는 기본적으로 약국을 차리거나 다른 사람의 약국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고 제약 회사 연구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최근에는 바이오 업계와 화장품·건강기능식품 업계에서도 약사들을 원한다. 종합병원 조제실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의 ‘빅5’ 병원에서만 600명 넘는 약사가 일하고 있다. 약사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알졌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스스로 약국을 차린 ‘개설 약사’의 연평균 소득은 1억 1025만 원, 병원 약사의 평균 연봉은 5848만 원이었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약 제조 과정에서 약사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약은 부작용을 동반해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제품인 만큼 다른 공산품과는 제조와 관리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보관이 잘못될 경우 약 성분이 변질돼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끼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규제 당국은 이 같은 우려에 더 무게를 두고 여전히 품질 및 제조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한 관계자는 “GMP에서 요구하는 관리 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제조관리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며 “GMP 조사관의 역량을 강화해 단순 적발 위주의 감시뿐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업체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맹준호 기자·김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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