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안 내도 되니 뭐든 자유롭게 경험해봐”
유통업계에서 온·오프라인 구분 없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전통 유통 강자인 백화점들이 최근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신생 e커머스에 비해 기발함이나 도전 정신, 실행력 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결과 보고’나 ‘목표 설정·달성’ 같은 업무 부담을 없애고 ‘경험’을 중시하는데, 실제 업무와 연결될 경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다는 게 백화점들의 설명이다.
1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10월 처음 시작한 해외 시장조사 프로그램인 ‘인사이트 투어’ 국가와 기간을 늘려 오는 3월과 4월 진행한다. 지난해 10월과 11월 총 8개 조 50여 명의 임직원이 일본 도쿄를 다녀왔는데, 올해는 8개 조가 일본 도쿄와 태국 방콕으로 가 현지의 다양한 유통 현장을 둘러본다. 2박 3일 정도였던 체류 기간도 이번엔 도쿄 3박 4일, 방콕 3박 5일로 늘렸다.
인사이트 투어는 해외 시장조사를 통해 백화점 내 다양한 구성원이 소통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결과 보고’가 없다는 게 특징이다. 평소 ‘다양한 경험과 이를 통한 혁신’을 강조해 온 정준호 대표가 프로그램을 통해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영감을 얻고, 직무 전문성을 강화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정 대표의 접근은 적중했다. 지난해 12월 롯데백화점은 ‘축산 앤드 와인 페스티벌’을 진행했는데, 고기 부위별로 어울리는 와인을 페어링해 세트로 판매하는 행사가 호평받으며 행사 기간 축산·와인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5%, 25% 신장했다. 이 기획은 인사이트 투어 때 현지 백화점 식품관과 유명 다이닝을 방문해 얻은 아이디어를 반영한 것이었다. 백화점 관계자는 “당시 (사전에 정해진) 8개 주제 중 평소 관심 있는 테마를 선택한 서로 다른 직무·직급의 사람들이 한 조가 돼 다양한 의견을 공유했다”며 “관심사가 같아 지금도 자주 모여 아이디어를 지속 발전시키고 있는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어 내용이) 현업에 적극 활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롯데는 직급과 상관없이 특정 분야 전문성을 지닌 직원이 ‘사내 강사’로 역량을 공유하는 일명 ‘사부 아카데미’도 4월부터 정례화한다. 지난해 직원들이 자신의 취미나 전문성을 동료들에게 전수하는 ‘사부의 클래스’를 진행했는데 내부 반응이 좋아 이를 ‘사부 아카데미’라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으로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사부로 선정된 직원에게는 직무 전문성 강화를 위한 자격증, 외부 교육, 전문 도서 비용 등을 지원한다.
현대백화점(069960)에는 김형종 사장이 아예 “성공 기준이 매출 아닌 새로운 경험의 여부”라고 못 박은 부서가 있다. 지난 2020년 신설된 스트리트 패션 편집숍 ‘피어(PEER)’ 전담팀이 그 주인공이다. 이 팀은 책임급 리더 한 명을 제외한 팀원 6명이 모두 입사 5년 전후의 MZ세대 직원들이다. 현대백화점 상품 본부 바이어의 60% 이상이 ‘경력 10년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조직 구성이다. 김 사장은 이 팀을 만들 때 “수익성과 타협하며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파격적인 자율권을 부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장 조사와 스터디 차원에서 다양한 해외 교류와 탐방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파리 패션위크 참가다. 어린 연차의 패션 MD들이 압박 없이 자유롭게 현장을 둘러보고, 현지 브랜드와 접촉하다 보니 오히려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6월 피어 전담팀은 파리 패션위크에 참석해 프랑스 캐시미어 브랜드 ‘프롬퓨처(From Future)’를 국내 최초로 선보였고, 프랑스 컨템포러리 브랜드 ‘드롤드무슈(Drole De Monsieur)’, 덴마크 디자이너 브랜드 ‘스타인고야(Stine Goya)’ 등도 신규로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