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한센인은 가족…아름다운 내면 봐 주길"

■43년 봉사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유의배 신부

내전 아픔 공감●스페인서 한국행

상처 치료할 때만 환자로 대해

100명 장례 직접 치르고 염도

"한센·장애인, 내겐 소중한 존재"

유의배 신부가 지금까지 산청성심원을 거쳐가거나 현재 머물고 있는 한센인들의 사진첩을 보며 한 명 한 명 설명하고 있다.유의배 신부가 지금까지 산청성심원을 거쳐가거나 현재 머물고 있는 한센인들의 사진첩을 보며 한 명 한 명 설명하고 있다.




한 신부가 진주행 일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승객들은 모두 이목구비와 손가락이 멀쩡한 일반 주민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이들을 보고 신부는 깜짝 놀랐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손이 뭉개지고 눈·코·입이 성하지 않은 한센인과 같이 지낸 탓이다. 세월이 지난 후 신부가 자신을 찾은 방문객에게 말했다. “매일 한센인만 보다가 다른 사람을 보니 너무 낯설었어요. 그때 승객들이 나를 봤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센인을 위해 43년째 봉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유의배(77·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수도명 알로이시) 산청성심원 주임신부 이야기다. 유 신부는 ‘푸른 눈의 한센인 친구’로 유명하다. 1998년 대통령 표창을 시작으로 아산사회복지재단 사회복지상, 이태석 봉사상, 적십자 인도장 금상 등 숱하게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경남 산청성심원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자리에서는 “상을 많이 받다 보니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메달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준 적도 있다”면서 “그래도 상은 좋은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유의배 신부가 지인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유의배 신부가 지인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유 신부는 스페인 소도시 게르니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내전의 잔혹함을 다룬 피카소의 역작 ‘게르니카’의 배경이 된 바로 그곳이다. 부모에게 내전의 혹독한 경험을 전해 들은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동변상련을 느낀 듯하다. 유 신부는 “선배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주위의 만류로 볼리비아로 가기는 했지만 2년 후 한국행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1976년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1980년 5월 성심원에 터를 잡았다.



일반적으로 신부라고 하면 엄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유 신부는 이와 거리가 멀다. 말할 때는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장난스러운 몸짓도 자주 나타난다. 하얗고 긴 턱수염은 근엄함의 상징이 아니다. 손으로 줄이고 돌리며 상대방과 편하게 대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한센인과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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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에게 한센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같이 밥 먹고 뒹굴며 노는 그냥 가족이다. 환자로서 대할 때는 매일 돌아다니며 상처를 치료하고 보살필 때뿐이다. 그는 “처음 성심원에 왔을 때 한센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이 ‘신부나(신부야) 우리 집에 와 밥 먹어’라며 집으로 초대해 간 적이 많았다”며 “그때 손가락이 없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손으로 밥을 먹이는 것을 보고 ‘전염의 문제는 전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유의배 산청성심원 주임신부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과 한센인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유의배 산청성심원 주임신부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과 한센인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국가에서 금하고 있어 못 하지만 한때는 한센인이 숨을 거뒀을 때 직접 염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 그의 손을 거쳐 저세상으로 떠난 이가 15년간 100명에 달했다. 유 신부는 “한 번은 환자 한 분이 물에 빠져 숨졌는데 이틀 동안 물속에 있어 퉁퉁 부은 몸을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았다”며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 내가 직접 염을 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한센인들이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어떤 할아버지가 지나가던 그에게 밥을 같이 먹자며 입에 넣었던 숟가락을 옷으로 쓱쓱 닦아 건넸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펄쩍 뛸 일이었지만 그는 아무 일 아닌 양 그 자리에 앉아 수저를 받았다. “지나고 보니 시험이었던 것 같아요. 진짜 자신들과 같이 지내려고 온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지요. 그날 이후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는 성심원 그 자체가 됐다.

그의 손길이 한센인에게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성심원에 있는 한센인은 약 70명으로 처음 왔을 때 550명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12%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빈자리의 일부를 장애인들이 채우고 있다. 그는 “장애인들과 대화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매한가지”라며 “나에게는 한센인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유 신부는 사람들에게 ‘겉을 보지 말고 속을 보라’고 부탁한다. 겉으로는 흉측할 수 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아름답고 예쁜 사람들이 한센인과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마음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며 “한센인이나 장애인은 그런 점에서 진정 아름다운 존재들”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송영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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