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日시민은 매년 위령제… 우린 뭐 했나 부끄러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위령시설 보수 추진 김진영씨

한국서 세운 현지 유일 기림 시설

'보화종루' 건립 주역 김의경씨 딸

100주년 맞아 대대적 개보수 추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 개보수 추진위원인 김진영 씨.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 개보수 추진위원인 김진영 씨.




“간토(關東)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 많은 일본인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속아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매년 위령제도 열고 있죠. 아무 관심도 없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죠.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 기림 시설 ‘보화종루’ 개보수 추진위원을 맡고 있는 김진영(55·사진) 씨는 “이번 작업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1923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약탈 방화를 하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현혹된 일본인들이 수많은 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알려진 희생자만 무려 6661명에 달하지만 일본 정부는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기리기 위해 지어진 보화종루. 이 종루는 1985년 한국 국민들이 현지에 세운 유일한 기림 시설이다. 사진 제공=김진영 씨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기리기 위해 지어진 보화종루. 이 종루는 1985년 한국 국민들이 현지에 세운 유일한 기림 시설이다. 사진 제공=김진영 씨



1985년 일본 관음사에 설립된 보화종루는 한국 시민들이 세운 유일한 현지 조선인 희생자 위령 시설이자 기림 시설이고 이를 주도한 희곡작가 김의경 씨는 진영 씨의 부친이다. 1999년에는 위령비를 건립하고 발굴된 학살 희생자 6명의 유해를 안치하기도 했다. 이후 잦은 지진으로 단청은 물론 기와·기둥까지 훼손되면서 보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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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보화종루 개보수 작업을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간토 조선인 학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가장 큰 이유는 유족이 거의 없다는 점. 희생자들이 대부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넘어갔거나 돈벌이를 위해 무작정 현해탄을 건넌 탓이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진실 규명을 촉구할 구심점도 없고 관심도 없어 조선인의 억울한 죽음을 잊은 채 지내왔다”며 “이제부터라도 잃어버린 역사를 직시하고 그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파헤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를 포함한 개보수추진위원회가 보화종루에 매달리는 것은 기림 시설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기억과 약속의 매개물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비록 암울한 역사지만 이것을 기억함으로써 양국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갖게 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만 담아주는 게 아니라 상징을 통해 기억한다면 시공을 초월한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것이 인류애이며 문명의 진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치바현 야치요시 주민들이 관음사 주변에 세운 간토대지진 희생자 묘비. 사진 제공=김진영 씨일본 치바현 야치요시 주민들이 관음사 주변에 세운 간토대지진 희생자 묘비. 사진 제공=김진영 씨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진실 규명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가해자인 일본인들 속에서 나오고 있다. 일본에는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나 추모 팻말이 20곳이나 존재한다. 조선인 학살에 가담했던 현지인들이 죄책감에 스스로 세운 것들이다. 매년 추모제를 지내는 마을도 알려진 것만 4~5곳에 이른다고 한다. 김 씨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본인들이 하는 노력을 보면서 되레 고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며 “일본 국민과 정부는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정치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일본 정부와 싸우자는 것도 아니다. 친일 또는 반일의 문제와는 더더욱 상관없다. 원하는 것은 그들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도대체 얼마나 희생됐는지 아는 것이다. 김 씨는 “이 일을 하면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이들의 표정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 같아 너무 힘들었다”며 “일본 정부에 정확한 희생자 수를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 주장하고 있는 몇백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이 학살당했을 수 있다는 개연성만이라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림 시설 개보수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예상 비용은 7000만~8000만 원 정도. 기부를 통해 모은 돈은 1000만 원밖에 안 된다. 그래도 정부나 기업에 손을 벌릴 생각은 별로 없다고 한다. 힘들기는 하지만 정치·시민운동이 아닌 순수 문화 예술 활동의 하나로 유지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씨는 “1년에 단 한 사람만 기억하더라도 오래갈 수 있는 활동으로 남고 싶다”며 “이것이 더 많은 만남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송영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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