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전북 남원에서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은 불안감으로, 불안감은 절박함으로, 절박함은 다시 악몽으로 바뀌었다. 30년이 그렇게 흘렀다. 무남독녀 외동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산이 세 번 바뀌었지만 아직도 자식이 돌아오는 꿈을 꾸는 아버지의 이름은 서기원.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다. 서울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서 대표는 “딸만 찾을 수 있다면 내 생명도 주겠다”고 호소했다.
원래 서 대표는 탄탄한 공장, 골프장, 여행 업체 등을 운영했던 중소기업 대표였다. 금지옥엽 외동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바로 그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딸을 찾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혹시 사고가 났나 병원도 가보고 어쩌면 하는 생각에 장례식장도 뒤졌어요. 시설들도 수도 없이 찾았습니다. 그렇게 강원에서 제주까지 모든 곳을 싹 뒤졌지만 헛일이었죠. 이후에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기다리는 것 외에 할 게 없더라고요.”
서 대표는 그때 정부와 법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경찰은 실종 사흘이 지나야 신고를 접수한다. 골든타임이 지난 후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다른 실종 아동 부모들과 만나 협회를 결성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2015년 ‘실종아동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실종아동법)’ 제정과 실종 대상을 사건 발생 당시 만 18세 미만 아동으로 바꾼 것이 그 결과물이다. 그는 “이렇게 뛰어다니며 법을 만들고 바꾼 게 50개나 된다”며 “덕분에 실종 아동을 이전보다 빨리 찾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딸을 찾으러 수십 년을 뛰어다니다 보니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나라의 실종 아동은 통계상 약 500명이지만 실제로는 100배 정도 많다. 이 중 80%는 정부와 경찰이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다고 서 대표는 믿는다. 그는 “최악의 상황이 아닌 한 장기 실종 아동이나 장애인들의 95%는 시설에 있다고 보면 된다”며 “정부와 경찰이 의지를 갖고 시설을 전수조사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원망으로 바뀌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종종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해외에 입양되기도 한다. 한쪽 부모가 배우자 몰래 외국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 모두 조금만 노력하면 어머니·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고 나면 국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서 대표의 외침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서 대표는 치아가 모두 다 닳았다. 밤마다 딸을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고 자기 때문이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 아내와도 따로 지낸다. 친구는 물론 가족과의 왕래는 끊긴 지 오래다. 남들이 자신 때문에 웃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 힘들었던 탓이다. 다른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실종 부모들은 화가 많아서 위장병이나 불면증 같은 것들을 달고 산다”며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딸이 실종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서 대표는 아직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잠을 잘 때 현관문을 열어 놓았다. 그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 아직도 문을 잠그지 않는 때가 많다. 밤에 개가 짖으면 ‘혹시’ 하고 밖을 내다보고는 한다.
‘다시 만나면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다는 서 대표는 마지막으로 관할 부처가 부모들의 입장에 서서 실종 아동들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실종 아동의 부모들은 사건이 일어난 그 시기에 그대로 살고 있어요. 이들이 하루빨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국가의 의무가 그런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