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하루]브루투스 칼에 쓰러진 카이사르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역사에는 분수령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 전과 후가 판이한 사건이 벌어질 때가 그런 경우다. 어떤 때는 누군가의 탄생이 분수령이 된다. 예수의 경우가 그렇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인류 역사를 주전(BC·Before Christ)과 주후(AD·Anno Domini)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누군가의 죽음이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바로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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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친 카이사르의 생애는 그가 쓴 ‘갈리아 원정기’에 잘 나타나 있다. 카이사르는 또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귀족 출신이었지만 평민의 편에 서서 원로원과 대립각을 세웠다. 평민들에게 카이사르는 벗이자 대변자였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귀족들이 점유하고 있던 막대한 토지를 카이사르가 자신들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농민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실패했던 농지 개혁의 과제를 카이사르가 완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카이사르는 섬세하기까지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카이사르가 시내 도로의 빗물 웅덩이를 메우는 일까지 직접 챙겼다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극장의 가격표까지 유심히 살필 줄 아는 대중 정치가였다. 경연의 우승자에게는 즉석에서 직접 지은 시문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만큼 문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질수록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경계했다. 오늘날 대통령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평민 독재의 출현을 염려한 원로원은 마침내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를 직접 죽인 것은 측근이었던 브루투스 일파였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카이사르는 스물세 번이나 자상을 입었다고 한다. 보름달이 뜨는 3월 15일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 그날 이후 카이사르가 살해된 날은 불길한 날의 대명사가 됐다. 카이사르는 살아서 황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 될 만큼 길이 남았다. 독일어의 카이저, 러시아어의 차르가 바로 그것이다. 제왕절개를 뜻하는 독일어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도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카이사르를 탁월했던 역사 속 황제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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