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한 번도 경험 못한 '超공급과잉' 예고…"향후 10년이 K반도체 성패 갈라"

[미국發 2차 테크빅뱅]

<3> 위태로운 칩동맹-반도체 패권 '錢의 전쟁'

신·증설 라인 2~3년 뒤부터 속속 완공

빅사이클 속 수요변동에만 익숙하다

공급發 치열한 생존경쟁 불가피할듯

美·中 등 각국 대규모 보조금 지급도

"기술력·인재 양성으로 생태계 다져야"

삼성전자 반도체클러스터가 들어서는 경기 용인시 남사읍 일대 전경. 연합뉴스삼성전자 반도체클러스터가 들어서는 경기 용인시 남사읍 일대 전경. 연합뉴스




삼성전자·TSMC·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앞다퉈 초대형 투자 계획을 내놓는 배경에는 결국 ‘반도체 패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국가 안보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에 따라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용인해오던 미국이 기존 전략을 뒤집으면서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장 유치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대규모 투자 행진이 사상 유례없는 ‘초(超)공급과잉’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나 지역별로 공정은 다르겠지만 이르면 3년 뒤부터 주요 반도체 공장에서 제품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면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우리나라 대표 반도체 기업들이 천문학적 보조금을 등에 업은 해외 반도체 기업들과 운명을 건 생존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 서울경제신문이 글로벌 주요 반도체 업체들이 최근 1년 내 발표한 투자 계획을 취합해 합산한 결과 공식 발표 금액만 최소 140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 환산하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증설 라인(1개당 30조 원) 47개에 이르는 막대한 생산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금액이다.

사실 반도체 업계에서 최근 10여 년 동안 공급과잉은 낯선 단어에 가까웠다. ‘과잉’보다는 ‘부족’이 반도체 산업의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2010년대 이후 반도체 시장에서는 공정 난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반도체 생산 물량을 늘리는 데 더 많은 시간과 투자가 요구됐다. 이에 따라 공급 물량이 시장 예상을 밑돌아 공급 부족이 장기화했고 반도체 가격이 오르는 일명 ‘빅사이클’ 구조가 발생했다. 2017~2018년 메모리반도체가 사상 최대 실적을 낼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이유가 있다.




반도체 업계의 2차 빅사이클로 볼 수 있는 코로나19 시기(2021~2022년)의 반도체 호황에는 여기에 더해 예상 밖의 수요 폭발이 있었다. PC·TV 등에 대한 수요가 갑작스레 늘면서 반도체 품귀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최근 반도체 값이 하락하는 것도 절대적 공급 자체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수요 측면의 기저 효과와 경기 침체 등이 겹친 ‘수요예측 실패’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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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D램의 경우 10년 전까지만 해도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로 선폭을 줄여갔지만 이제는 1㎚로 단위가 달라졌고 그마저도 과거보다 속도가 느려졌다”며 “파운드리 업체들이 공개하는 공정 로드맵도 실제 현장에서는 누설전류를 잡는 공정 개선에 한계가 있어 공급 확대가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의 투자 전쟁 결과가 나타나는 3년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2020년대 이후 경쟁적으로 착공에 들어간 팹들이 완공되는 2025~2026년부터 본격적인 공급과잉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 과정에서 기술 경쟁력이나 재무 기반이 부실한 기업은 상당한 고통과 구조 조정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반도체 산업의 경쟁이 ‘국가 대항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점을 감안하면 3년 뒤 벌어질 ‘치킨게임’이 정부 간 대리전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존에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민간기업만 살아남아 시장 독점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면서 우리 기업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미 국무부 경제기업 담당 차관보가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각국 정부가 민간 분야에 대규모 지원을 하는 보조금 경쟁은 피하기를 원한다’고 발언한 일이 있다”며 “현재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다른 나라들은 보조금 전쟁에 뛰어들지 말라는 우회적 경고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몇 년 뒤 공급과잉에 따른 생존 경쟁이 펼쳐지더라도 미국 기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리겠다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 앞으로 10년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흥망을 결정지을 것”이라며 “기업은 기술 경쟁력으로 ‘충성 고객’을 유지하고 정부는 기초과학과 인력 육성을 집중 지원해 반도체 생태계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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