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겉으론 '동맹', 속으론 '투자는 우리 것'…1400조원 반도체 '쩐의 전쟁' [biz-플러스]

■전세계 펼쳐진 미국발 '2차 테크빅뱅'

공급망 우위 선점 속 천문학적 투자 경쟁

'초공급 과잉' 속 각국·기업 생존경쟁 펼쳐질 듯

지난해 5월 20일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가운데)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5월 20일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가운데)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각국 정부와 기업이 결합된 형태의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이 쏟아지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선점하려는 각 나라들이 겉으로는 동맹을 맺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국 내 투자에 혈안이 되면서 결국 ‘치킨게임’으로 흐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향후 10년이 반도체 패권을 좌우할 핵심 기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3일 서울경제신문이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들이 한국·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에 계획을 내놓았거나 집행할 예정인 투자 금액을 산출한 결과 1400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567조, 미국 618조, 유럽·일본 190조…'쩐의 전쟁'




삼성전자는 최근 경기도 용인에 300조 원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팹) 5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경기도 평택에 부지를 확보한 P4·P5·P6 등 3개 팹 구축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뿐 아니라 지난해에는 미국 텍사스주에 2034년까지 11곳의 팹을 설립하기 위해 1921억 달러(약 252조 원)를 투입하겠다고도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21조 9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 인텔은 전 세계에 최대 2100억 달러(약 274조 원)를 쏟아부을 예정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최대 1000억 달러 규모의 증설 계획을 공개했고 유럽에는 800억 달러를 투자해 생산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메모리반도체 3위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뉴욕주에 1000억 달러를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한 대만 TSMC도 미국, 유럽, 일본 등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쏟아내는 중이다. TSMC는 지난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건설할 파운드리 공장 투자 규모를 기존보다 3배 이상 늘린 400억 달러로 발표했다. 일본에는 1조 엔을 들여 남서부 구마모토현에 두 번째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유럽에서도 투자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독일 드레스덴에 공장을 투자하기 위해 정부와 협상 중이다. 규모는 수십 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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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각국에 예정된 투자 규모를 환산하면 최장 20년 동안 한국 567조 원, 미국 618조 원, EU 127조 원, 일본 60조 원에 달한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가 추정한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 6135억 달러(약 802조 원)의 1.7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천문학적 투자 뒤에는 ‘글로벌 패권주의’




삼성전자·TSMC·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앞다퉈 초대형 투자 계획을 내놓는 배경에는 결국 ‘반도체 패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안보와 연결되고 미국-중국의 패권 경쟁 심화, 글로벌 공급망 불안 지속 등 불확실성이 계속 커지는 상황에서 각국이 자국의 이익에 매진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대규모 투자 행진이 실제로 모두 집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투자가 이뤄진다면 사상 유례없는 ‘초(超)공급과잉’으로 연결될 수 있다. 각국 대형 기업들이 최대 향후 20년 간 투자하겠다고 공개한 1400조 원은 단순 환산하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증설 라인(1개당 30조 원) 47개에 이르는 막대한 생산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금액이다.

지금까지 공급 과잉보다 ‘부족’에 치우쳐졌던 반도체 업계는 최근 들어 수요 예측 실패로 전반적인 부진의 늪에 빠진 상태다. 여기에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의 투자 전쟁 결과가 가시화하는 3년 뒤부터는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2020년대 이후 경쟁적으로 착공에 들어간 팹들이 완공되는 2025~2026년부터 본격적인 공급과잉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 과정에서 기술 경쟁력이나 재무 기반이 부실한 기업은 상당한 고통과 구조 조정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반도체 산업의 경쟁이 ‘국가 대항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점을 감안하면 3년 뒤 벌어질 ‘치킨게임’이 정부 간 대리전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면서 우리 기업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미 국무부 경제기업 담당 차관보가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각국 정부가 민간 분야에 대규모 지원을 하는 보조금 경쟁은 피하기를 원한다’고 발언한 일이 있다”며 “현재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다른 나라들은 보조금 전쟁에 뛰어들지 말라는 우회적 경고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몇 년 뒤 공급과잉에 따른 생존 경쟁이 펼쳐지더라도 미국 기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리겠다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는 과도한 투자 경쟁이 시장의 공멸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몇 년 뒤 투자가 마무리되고 공급 과잉이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수익이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공급망을 내재화하는 과정에서 칩4(한국·미국·일본·대만) 등 글로벌 동맹 역시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김용석 성균관대 교수는 “전 세계에서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하고 있어 몇 년 뒤 수급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우려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 앞으로 10년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흥망을 결정지을 것”이라며 “기업은 기술 경쟁력으로 ‘충성 고객’을 유지하고 정부는 기초과학과 인력 육성을 집중 지원해 반도체 생태계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진동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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