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연금(CPP)이 1997년 기금 소진이 임박하자 연기금 개혁에 나섰다. 보험료를 올렸을 뿐 아니라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를 출범시키는 등 지배구조까지 확 바꿨다. 지배구조 개편은 기금 투자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해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데 맞춰졌다. 투자위를 분리한 캐나다 연금은 정부의 운용 간섭을 배제하고 기금 운용 대상을 주식·채권·대체투자 등으로 대폭 확대했다. CPPIB 홈페이지를 보면 이 위원회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CPPIB는 자신들의 의무가 ‘최대 수익률 달성’이며 “기금은 정부와 거리를 두고 운영되고 있다”고 명시했다. 또 “정치적 의제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투자 의사 결정에 대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격리돼 있으며 경영진은 독립적인 이사회에 보고한다”고 했다. 이사회는 거버넌스·투자·재무 전문가인 헤더 먼로블룸 의장을 비롯해 12명 전원이 투자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심지어 미국·영국 국적의 전문가까지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수익률 극대화에만 초점을 맞춘 이사회 구성이다. 무려 25년 전에 단행한 캐나다의 개혁 사례는 지금까지도 연기금 고갈로 골머리를 앓는 선진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 공적연금(GPIF), 미국 연방퇴직저축투자위원회(FRTIB), 네덜란드 공적연금(ABP)도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기금 운용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 4대 연기금 중 하나인 국민연금의 거버넌스는 정반대다.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는다. 여기에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농림축산식품부·산업통상자원부 차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5명의 정부 측 인사가 당연직 위원이 되고, 사용자 대표·근로자 대표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투자 전문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연금보험료 납부자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구성이라지만 사실상 정부와 재계·노동계·소상공인 측이 자리를 나눠 먹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정부 측 인사와 사용자 대표가,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정부와 노동계 대표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연금 운용을 좌지우지한다. 국민연금이 특정 회사에 대한 투자를 늘리거나 의결권을 행사하면 색안경부터 쓰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비전문가 일색이다 보니 기금운용위 회의는 말 그대로 요식 행위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 25번의 회의 가운데 복지부 장관의 참석률은 68%에 그쳤고 차관들 출석률은 25%가 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복지부가 정권 입맛에 맞는 안건을 올리면 그대로 추인하는 거수기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기금운용위가 정치판이니 수익률은 저조할 수밖에 없다. 최근 10년간 캐나다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10%에 달하는 반면 국민연금은 4.7%로 절반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8.3% 적자까지 냈다.
윤석열 대통령이 3대 개혁 과제로 꼽은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활발하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40년 적자로 전환된 후 2055년에는 바닥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논의되는 보험료율 인상과 연금 수급 연령 상향 등도 중요하지만 연금 운용의 전문성 확대와 기금운용본부 서울 이전 등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이 함께 제시돼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수익률을 1%포인트만 높여도 고갈 시기를 6~8년 늦출 수 있다.
노태우 정부에서 도입된 국민연금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기금 고갈을 늦추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후에는 개혁이 실종됐다. 노무현 정부를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는 다수당을 차지하고도 국민연금 개혁은 손을 놓은 채 기초연금 인상이라는 단감만 빼 먹었다. 국민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연금 개혁에 성공한 캐나다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행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연금 개혁을 늦춘다면 윤석열 정부도 문재인 정부와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