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강을 끼고 미국 뉴욕 맨해튼을 마주보고 있는 뉴저지 잉글우드 클리프. 28일(현지 시간) 차량을 타고 이 지역의 강변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CNBC와 유니레버, LG 등 세계적 기업들의 넓은 사옥에 이어 중형 오피스 건물들이 1㎞ 이상 이어진다. 차량의 속도를 늦춰 이 중 한 곳에 들어서자 부지 입구에 '임대가 가능하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임대 안내판은 그 옆 건물에도, 그 다음 건물에도 설치돼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강건너 뉴욕 맨해튼도 마찬가지다. 타임스퀘어 인근의 한 오피스 빌딩은 1층과 2층이 통째 비워져 있기도 했다. 이미 지어진 지 수십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사정이 급해지자 마치 신규 분양을 하듯 1층 시설 한 켠에 임대 상담을 위한 사무실을 꾸리고 있었다.
“렌트를 구하는 곳이 많다는 이야기는 투자자들이 임대료를 못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뉴저지에서 활동하는 한 부동산 관계자는 “겉으로 보이는 광고는 임대지만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 힘든 건물주들이 티나지 않게 건물을 팔아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다만 이들은 2년 전 정점 가격에 팔기를 원하고, 매수자들은 그 가격에 매수할 생각이 없다. 거래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는 상업용 부동산의 가격 하락 압력이 커졌다는 의미다. 금융서비스업체인 KBW는 이달초 발간한 보고서에서 앞으로 2년동안 사무용 부동산 가치가 30% 이상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 지역의 한 3층 짜리 상업용 건물은 올 1월 150만 달러에 통 매물로 나왔다가 최근 호가를 130만 달러로 낮췄다. 이 건물의 중개 담당자는 “현재 가격은 굉장히 매력적인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직접 확인한 건물 임대 상황은 3층은 이미 공실이며, 두 달 뒤면 2층 사무실도 임대가 만료된다. 만약 6%대의 이율로 건물 매수 가격의 절반을 대출로 받는다면 세금과 이자, 원금을 합쳐 월 6000달러 대의 지출이 발생하지만, 이는 공실이 모두 채워져야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다. 중개인은 “임대 수요는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같은 현상이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로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유니언스퀘어 옆 명품거리로 꼽히는 그랜트 스트리트도 신호등을 두고 사거리 네 귀퉁이 중 세 곳의 건물이 모두 빈 채로 임차인을 찾는 '임대(Lease)' 표지판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로 옆블럭인 서터스트리트로 접어들자 250번지부터 6개의 건물이 모두 비워져 있어 유령 도시를 방불케 했다.
맞은편에는 치폴레 매장과 주차장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임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 기업의 본사가 모여있는 캘리포니아 애비뉴의 경우 상대적으로 긴 임대 기간을 채우지 못해 임차인이 '전대(Sublease)'를 놓는 곳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오피스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세일즈포스 타워의 경우 이달 초 6개층을 임대 매물로 내놨다. 전체 61개층(8만1300㎡)의 14%에 달하는 규모다. 이미 세일즈포스 서관의 경우 지난해부터 절반 가량이 임대 매물로 나와있는 상태다. 커머셜엣지 리포트에 따르면 올 들어 샌프란시스코에 나온 오피스 매물 규모가 3억800만 달러(약 4000억원)에 이른다. 지난 달 기준 오피스 공실률은 19.3%로 전년 대비 2.3%포인트 올랐다.
통계상 공실률이 줄고 있다는 워싱턴DC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연방정부라는 든든한 수요가 뒷받침하고 있는 워싱턴 DC ‘K스트리트’(로펌 및 로비회사들이 모여있는 거리) 역시 지난 2~3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1층만 겨우 임대가 나갈 정도로 공실률에 몸살을 앓고 있다.
워싱턴DC 부동산 시장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연방정부 재원을 발판으로 크게 휘청거리지 않았으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늘어난 재택 근무가 당시보다 시장에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현지의 한 빌딩 관리인은 “DC 부동산 시장의 최대 수요층인 로비 회사, 로펌, 기업 대관 조직 등의 사무실 확장에 대한 수요가 전혀 없다”면서 “연방정부 마저 아직 공식적으로 재택근무를 종료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유동인구가 코로나19 이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현지에서는 “상업용부동산 시장은 느리게 움직이는 열차 사고”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탈선을 예상할 수 있지만 멈추기 쉽지 않다는 의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채무 불이행이나 대출 조건 변경, 은행과 건물주들의 여력 감소 등에서 오는 부담이 조금씩 쌓이면서 상업용부동산 시장의 하락은 단계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지 금융권에서도 상업용 부동산이 미국 경제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분위기다. 뉴욕의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공실이 늘고 금리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대출 이자라도 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며 “은행 입장에서는 연체에다 담보 가치하락이 겹쳐 부실이 쌓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직격탄을 맞는 곳은 지역 중소 은행이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미국 상업용 부동산 대출의 80%는 자산 2500억 달러 이하 지역 중소 은행이 담당하고 있다. 미국 데이터업체 트렙은 지난달 상업용부동산의 저당증권(MBS) 연체율이 3.12%로 0.18%포인트 올라 2020년 6월 이후 두 번째로 큰 폭으로 올랐다고 분석했다.
이는 은행 부실을 넘어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월가의 한 금융 관계자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대출 기준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건물주들이 기존 대출을 일부 상환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상환하지 못한다면 건물은 경매에 넘겨지고, 은행은 은행대로, 건물주는 건물주대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록에 따르면 앞으로 5년 동안 재약정이 이뤄져야 하는 상업용부동산 대출 규모는 2조5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3250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