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황에서는 안전(업무)을 안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어느 기업 관계자의 한숨 섞인 말이다. 본래 경영층을 포함한 모든 조직 구성원이 안전 활동에 적극 협력·참여하는 것이 선진 안전 경영 시스템의 핵심 요소다. 그러나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오히려 선진모델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중대재해법상 안전보건 확보 의무가 모호하고 중대재해 발생 시 가혹한 수사와 형사처벌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처음부터 안전 업무와 ‘연루’되지 않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들릴 정도다.
지난달 말에는 검찰이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그룹 회장을 처음으로 기소했다. 현행 중대재해법의 의무이행 주체인 ‘경영 책임자’는 대표이사나 최고 안전보건책임자(CSO)로 특정하는 게 맞다. 하지만 검찰은 그룹 회장이 채석산업 전문가이고 수시로 현장 지시와 안전 관련 보고를 받았다는 점을 기소의 근거로 내세웠다.
이번 기소는 역설적이다. 안전에 관여할수록 형사처벌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안전 업무를 안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했던 기업인의 한숨 섞인 말이 떠오른다. 물론 그룹 회장이 계열사 안전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산재 예방을 위해 바람직하고 권장할 일이다. 그런데 이번처럼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룹 회장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안전 경영이 더욱 요원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중대재해법의 존재가 오히려 중대재해 예방에 위협이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경총이 기업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봤더니 올해 기업부담지수가 가장 높은 규제로 중대재해법을 꼽았다. 조사 대상 12개 업종 중 절반이 넘는 7개 업종에서 1위를 차지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기업들이 중대재해법으로 고민하고 있다니 마음이 무겁다.
더 큰 문제는 안전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대비책이 매우 부족한 점이다. 현재까지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기소된 피의자(경영 책임자)는 대부분 중소기업 대표다. 내년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경제가 어려워 밤잠을 설치는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이제는 예기치 못한 사고 부담의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내놓았다. 처벌 위주 행정보다 기업의 예방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중대재해법의 과도한 처벌과 모호한 규정도 손보겠다고 약속했다. 경영 책임자 개념을 구체화하고 처벌 수준을 합리화하면 산업 현장의 혼란이 잦아들 수 있다. 중소기업 안전 관리 지원을 확대하고 필요하다면 법 적용 유예기간을 연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따뜻한 봄 햇살에 만물의 새 기운이 힘껏 도약하는 지금, 합리적인 중대재해법 개정을 통해 산업계에도 봄기운이 만연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