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한국과 일본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동시에 발생했다. 한국은 경상수지 적자가 45억 2000만 달러로 1980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였고 일본도 경상수지 적자가 2조 엔으로 1985년 이후 가장 많았다. 대중(對中) 수출 타격에 에너지 수입 의존도도 높다는 공통점을 가진 양국이 모두 취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는 외환이 국외로 유출된다는 의미인 만큼 자국 통화의 약세 압력으로 작용한다.
원·엔 재정환율이 1년 만에 100엔당 1000원을 넘어선 것은 비슷한 악조건에도 엔화가 원화보다 선방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엔화 자체가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영향도 크지만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일본에 크게 밀리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큰 기대를 걸었던 중국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효과가 예상보다 크지 않자 원화가 유독 크게 흔들리고 있다.
6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올 2월 28일 1322.6원에서 이날 1319.1원으로 0.2% 절상됐다. 같은 기간 엔·달러 환율은 136.1엔에서 131.0엔으로 3.8% 하락(가치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엔화는 최근 한 달 동안 전 세계 통화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절상됐다. 특히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이후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심화되며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 결과 원·엔 재정환율은 970.40원에서 1003.61원으로 대폭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그동안 엔화 약세가 과도했던 만큼 되돌림 과정에서 엔화 강세가 뚜렷해진 것으로 풀이한다. 지난해 10월 엔화는 32년 만에 달러당 150엔을 돌파했다. 이후 일본은행(BOJ)의 정책 조정 등이 이뤄지면서 약세로 돌아선 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긴축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가치가 점차 안정되는 양상이다.
반면 원화는 최근 엔화보다 중국 위안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중국 리오프닝 이후로도 제조업 경기 정상화가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으면서 위안화는 약세를 보이는 상황이다. 미중 갈등이 지속되는 점도 위안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는데 원화가 여기에 맞물려 움직이고 있다. 한미 간 금리 역전 폭이 역대 최대인 150bp(1bp=0.01%포인트)까지 벌어진 점도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기 흐름 자체도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 역시 수출은 어렵지만 최근 민간 소비와 설비투자를 중심으로 완만한 회복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우리 경제는 물가 대응 과정에서 금리를 빠르게 올린 영향으로 소비와 투자의 동반 부진이 발생하고 있다. 수출 역시 좋지 않다. 전망 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1.8%로 한국(1.7%)을 앞설 것으로 내다봤다. 자국 중앙은행의 평가도 비슷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의 성장률을 1.6%로 전망한 반면 BOJ는 1.7%를 예상하고 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현재 환율 자체가 대중 수출 부진 등 펀더멘털 악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며 “특히 중국 리오프닝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아 위안화가 약세를 보이는데 거기에 원화도 연동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BOJ의 완화적 정책 기조 전환 가능성도 엔화 강세의 요인이다. 9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우에다 가즈오 신임 BOJ 총재는 완화 정책 유지가 적절하다고 발언했으나 시장은 지속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다른 선진국과의 금리 차이가 크게 벌어졌고 과도한 중앙은행 자산 규모나 국채시장 기능 저하 등을 고려하면 완화 정책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상대적인 엔화 강세로 우리가 얻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엔화가 원화보다 대폭 절상되면 수출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요 자체가 없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명목 환율에 각국의 물가지수와 수출구조를 가중치로 적용해 수출 경쟁력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실질실효환율(REER)은 여전히 엔화가 원화보다 경쟁력이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96.26, 엔화는 77.96이다. 기준 연도(2010년)를 100으로 두고 이보다 높으면 해당 통화가치가 다른 교역국보다 고평가, 100 미만이면 저평가됐다고 볼 수 있다. 엔화는 여전히 저평가돼 수출에 유리한 상황이다.
원·엔 환율 상승에도 방일 여행객이 발걸음을 멈출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일본은 올해 1월 외국인 입국자 수가 150만 명을 돌파하면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월평균 입국자 수(266만 명)의 56% 수준까지 회복했다. 이 가운데 38%가 한국인(57만 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본을 여행하는 외국인 3명 중 1명은 한국인인 셈이다. 국내 항공사들도 일본행 항공편을 적극 늘리고 있어 일본 여행 수요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는 “일본은 리오프닝 이후 내수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실물경기가 좋지 않은 것이 반영된 결과”라며 “엔화가 강세라도 보복소비 수요가 있고 일본이 가기 편한 국가인 만큼 여행 수요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