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과정에서 폰뱅킹 등을 통해 급속한 예금 인출(뱅크런)이 일어난 일을 거론하며 “지금의 디지털 속도로 볼 때 (은행의) 담보 수준이 적절한지 더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20개국(G20) 중앙은행총재 회의 및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그룹(WBG) 춘계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이 총재는 이달 14일(현지 시간) 워싱턴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간 공을 들여온 여러 가지 감독 체제가 디지털 뱅킹으로 인해 그 유효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은행에 있는 예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은행 위기를) 정리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은에 따르면 은행 입출금·자금 이체 서비스에서 인터넷·모바일 뱅킹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60.4%에서 2022년 77.7%로 큰 폭으로 확대됐다.
이번 춘계회의에서도 세계 각국 중앙은행총재 간에 이와 관련한 논의가 있었으며 우리 역시 ‘안전장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이 총재는 전했다. 구체적으로는 은행의 담보자산을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미 한은은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을 현행 70%에서 8월부터 80%로 상향 조정할 예정이다. 2025년 8월 이후로는 100%까지 높인다.
이 총재는 “한국은행 결제망에 들어오는 기관은 지급 보증을 위한 담보자산이 있는데 결제하는 양이 확 늘면 거기에 맞춰 담보도 늘려야 한다”고 밝혔다. ‘은행에 담보를 더 가져오라고 요구하겠다는 것이냐’는 추가 질문에는 “(담보를) 높여야 하는지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다만 “SVB 같은 사태가 우리나라에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훨씬 안전하다”면서도 “만일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디지털뱅킹으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전 세계 금리 전망과 관련해서는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 같고 그동안은 빠르게 금리를 인상하는 기조에서 지금은 어느 정도 오랫동안 높은 금리를 유지해야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가느냐에 관심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나라별로 차이가 있는데 한국·캐나다·호주 등 많은 나라는 금리를 동결하고 앞으로 물가 추이를 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미국과 유럽은 금융 상황이 확실하게 정리가 되면 한두 차례 정도 금리를 올릴 소지가 큰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한국 경제의 ‘상저하고(上低下高)’ 전망과 관련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경기 개선과 중국의 경제 회복이 주요 요인이라고 설명하면서 “상저하고는 전 세계의 공통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앞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열린 간담회에서도 “올해 하반기에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며 하반기 경기 반등을 예상하고 있다.
이 총재는 같은 날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고위급 패널 토론에 참석해 지난해 환율 불안 당시 “외환 당국의 외환 개입이 ‘안정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이 1430원을 돌파하는 등 불안이 확산하자 당국은 지난해 3분기에만 환율 방어를 위해 사상 최대인 175억 달러 매도에 개입했다. 이 총재는 “지난해 9~10월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원화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하락했기 때문에 통화 개입 효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며 “당국의 외환 개입은 자국의 통화가치 하락을 늦춰 투자자들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데 여지를 줄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