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농단’ 사태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판이 200차를 맞았다. 형사사건에서 공판이 200차례나 진행되기는 극히 이례적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로 임 전 처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5년 차를 맞았지만 1심 선고가 나오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사법행정을 잘 아는 피고인의 의도적인 ‘재판 지연 전략’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까지 나온다.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1부(김현순·조승우·방윤섭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200차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이날은 임 전 차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4년 5개월(1633일)이 되는 날이다. 임 전 차장은 문재인 정권 초기인 2018년 11월 14일 재판거래 등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매주 한두 차례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피고인 측에서 신청한 박근혜 비선의료진으로 알려진 박채윤 씨의 불출석으로 증인신문이 무산되면서 재판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개입 의혹에 대한 서증 조사를 진행했다.
임 전 차장은 ‘사법 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5개월 만에 처음으로 기소된 ‘제1호 피고인’이다. 당시 핵심 공범으로 기소된 전·현직 판사들의 재판은 항소심 선고까지 모두 마무리됐지만 정작 임 전 차장의 재판은 1심 선고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행 소송 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형사사건의 경우 1심 선고는 6개월, 2·3심은 각 4개월 이내에 하도록 정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임 전 처장의 형이 확정되려면 정권이 한 번 더 바뀌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재판부가 매주 한두 차례씩 집중심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10월까지 수십 명의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고 하계 휴정기와 증인들의 출석기일 변경 등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올해 안에 1심 선고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 지연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임 전 차장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꼽힌다. 초기 재판부가 2019년 1월 첫 정식재판을 앞두고 주 4차례 재판을 예고하자 선임했던 변호사 전원이 사임했다. 임 전 차장 측은 “재판부가 소송지휘권을 남용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해 부당하게 재판을 진행해왔다”며 2019년 6월에 이어 2021년 8월 두 차례 재판부 기피를 신청했다. 재판부가 기피 신청을 기각했지만 이 때문에 재판이 6개월 넘게 중단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법관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바뀌자 임 전 차장 측은 수십 명에 달하는 증인신문 내용을 법정에서 다시 재생해야 하는 등 공판 갱신 절차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의도적인 재판 지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명수 코트(Court)’가 물러나고 사법부의 보수화 색채가 짙어질 때까지 의도적으로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의 퇴임이 예정돼 있고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 대법관 13명이 교체를 앞두고 있어 2·3심에서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보다 국민들의 신속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점도 재판이 장기화되는 데 한몫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검찰 수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는 “피고인 입장에서 재판이 장기화되면 비용이 많이 들고 변호인도 한정된 예산으로 재판을 진행하다 보니 현재는 이미 이익이 전혀 없는 마이너스인 상태일 것”이라며 “수사과정에서 진술 번복이나 허위 진술 등 검찰 진술조서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 사례가 많았던 게 재판 장기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