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은 클래식 음악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소련 사람으로 알고 있는 탁월한 음악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의 러시아 출신이 아니었다. 2007년 4월 27일 8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도 그중 하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소련 영토의 일부인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소련 최고의 첼리스트가 됐다. 그의 명성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루토스와프스키, 올리비에 메시앙, 벤저민 브리튼처럼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헌정받은 것으로 입증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또한 강단 있는 예술가였다. 모스크바음악원에 재학 중일 때 형식주의 작곡가로 비난받던 스승 쇼스타코비치를 옹호하며 학교를 자퇴했다. 1968년에는 ‘수용소 군도’를 집필하던 친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줬다. 게다가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공개서한을 여러 신문사에 발송했다. 이 일로 일체의 해외 연주를 금지당한 채 감시받던 그는 19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소련 정부는 시민권까지 박탈하며 그를 침묵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1980년에는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콘서트를 파리에서 열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던 날에는 장벽 아래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로 새 세상을 찬미했다. 1991년에는 러시아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크렘린 광장 시위에 참여했다.
음악을 통해 자유를 노래했던 점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삶은 카탈루냐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전설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를 떠올리게 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뛰어난 첼리스트였고, 역량 있는 지휘자였으며, 훌륭한 교육자였고, 평화를 위해 헌신한 예술가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슬라바’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슬라바가 떠난 자리를 우리 시대의 어떤 예술가가 채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