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대도약시키는 성과를 냈다. 특히 안보공약의 핵심은 미국의 핵·재래식 전력 등 모든 가용한 전력으로 동맹국을 본토 수준으로 지켜주는 ‘확장 억제’인데, 이번 정상회담은 확장 억제에 대한 신뢰성과 실효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확장 억제가 2006년 12월 양국 국방장관의 정례 협의체인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 처음 명문화된 후 17년 만에 한미가 큰 진전을 이룬 것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무력이 고도화되자 ‘미국이 뉴욕 등 자국의 대도시가 북한의 핵 공격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유사시 서울 등 대한민국에 대한 핵우산 공약을 지켜주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특히 북한이 최근 핵 어뢰, 고체연료 추진 방식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신무기를 개발하면서 이 같은 불안감이 커지자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한국판 핵 공유’ 수준의 정책을 담은 워싱턴 선언을 이끌어내고 핵잠수함의 한반도 상시 전개 약속을 받아내 불안감을 불식시킨 것이다.
핵우산과 관련해 ‘워싱턴 선언’에 담길 내용 중에서도 단연 핵심은 미국이 핵탄두를 장착한 핵추진전략잠수함(SSBN)을 한반도 해역에 상시 배치 수준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SSBN 상시 전개는 1980년대 이후 30여 년 만으로 한국 육상에 미국의 전술핵 또는 전략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과 다름없는 강력한 핵우산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미 해군이 운용하는 오하이오급 SSBN에는 475㏏(1㏏=TNT 1000톤의 파괴력)급 핵탄두를 탑재한 ‘트라이던트 II’ 미사일(SLBM)이 실려 있다. 이는 2차 대전 때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15㏏)의 32배에 달하는 위력이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전술핵 재배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전술핵을 육상에 붙박이로 배치하는 것보다 더 위력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는 핵 공격과 맞보복으로 상호 확증 파괴가 이뤄져 육상에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더라도 핵잠이 수중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보복 핵 공격인 ‘제2격(second strike)’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잠이 ‘최후의 병기’로 불리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이 이런 전략자산을 한반도 해역에 상시 배치 수준으로 자주 전개한다는 것은 설령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더라도 서울을 지키겠다는 보증수표나 다름없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어떤 상황이든 대한 안보공약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약속”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이 한반도 해역에 핵잠을 상시 배치 수준으로 얼마나 자주 전개할지, 또 그 사실을 공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개하지 않으면 국민 체감도도 떨어져 강화된 확장 억제 전략이 ‘수사’에 그칠 수 있다. 해상 연합훈련에 참가할지와 참여 사실을 공개할지도 주목된다. 미국은 핵무기를 탑재한 핵잠의 작전 활동을 거의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핵기획그룹(NPG)’과 유사한 한미 핵협의그룹 창설도 확장 억제 실현에 커다란 진전으로 평가된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맞춰 핵우산의 공동 기획과 집행, 정보 공유, 협의체 구성, 전략자산 배치 등을 지속적으로 요청해왔다. 한마디로 핵우산 제공 때 우리의 발언권과 참여권을 넓혀달라는 주문이다. 이른바 한국식 핵 공유 방식이다. 한미 핵협의그룹은 나토와 달리 국내에 미국의 전술핵을 배치하지는 않지만 양측 간 협의 채널이 구축되면 우리 측의 참여 범위가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핵 공격에 대비한 실제 연합훈련을 정례화하거나 우리 측이 전략자산 전개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는 확장억제수단운용연습(DSC TTX)이라는 형태로 토론식 운용 연습에 그치고 있다.
‘한미 핵협의그룹(NCG)’의 실체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두 개의 방안이 거론된다. 첫 번째는 기존의 차관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조직을 확대 개편해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별도로 상설 조직을 두는 방안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양국 국방장관 정기 협의 채널인 한미 SCM 아래에 핵 협의 실무 조직을 두는 방안이나 제3의 별도 협의체를 신설하는 방법도 있다. 관건은 협의 기구를 뒷받침할 상설 조직의 신설 여부와 우리 측 발언권의 수준이다. 후속 협의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핵 사용 결정권을 지닌 미국이 ‘핵 공유’ 수준으로 우리 측에 발언권과 참여권을 줄지가 관건으로 평가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진전되고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다만 핵 안보공약에 대한 우리 국민의 기대치가 높다는 점을 환기해 이번 한미 합의가 국민의 눈높이에 얼마나 맞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