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4조 원대의 반도체(DS) 부문 적자에도 불구하고 올해 투자 규모 확대를 선언한 것은 업황이 바닥을 친 상황에서 다가올 ‘업턴(시장 상승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메모리반도체 감산 효과가 2분기부터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하반기 본격적인 수요 회복에 대비해 선단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구상이다.
◇반 토막 난 반도체 매출…2분기까지 이어질 듯=삼성전자의 1분기 실적은 ‘반도체 쇼크’로 요약된다. 주력인 메모리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스템LSI(팹리스) 등 전 사업부의 실적이 위축됐다. DS 부문의 매출액은 지난해 1분기(26조 8700억 원)보다 49%나 줄었고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섰다. 메모리반도체사업부의 매출은 8조 9200억 원으로 전년 동기(20조 900억 원) 대비 56%나 급감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악화된 소비심리가 개선되지 않고 있고 제품 가격도 크게 낮아지면서 수익성이 나빠진 탓이다.
그나마 갤럭시 S23의 판매 호조로 전체 적자는 면했지만 다른 사업부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의 영상(VD)·가전사업부의 영업이익은 19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6.2%, 삼성디스플레이(7800억 원)는 28.4% 각각 줄었다. 전장 자회사 하만(130억 원)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점이 그나마 고무적이다.
2분기라고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낮다. 반도체 업황이 여전히 한파를 겪고 있고 1분기 적자 방어막 역할을 했던 스마트폰의 판매 효과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서는 2분기에 삼성전자 전체 실적이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신규 스마트폰 효과가 감소하는 2분기는 적자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2분기에 적자를 보일 경우 940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2008년 4분기 이후 15년 만의 일이 된다.
◇“감산으로 재고 감소 확대…하반기 수요 회복”=이 같은 위기에서도 삼성전자는 하반기 실적 개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각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감산 등 적극적인 조치 속에 시장 환경의 변화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콘퍼런스콜에서 “앞선 공시와 같이 생산량을 하향 조정 중”이라며 “2분기부터 재고 수준이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고 감소 폭은 하반기에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감산 발표 이후 시장 변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최근 반도체 현물가의 하락세가 눈에 띄게 둔화됐고 고객사들의 공급 문의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모바일·PC 수요 개선, 서버향 신규 중앙처리장치(CPU) 출시 및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에 따른 고용량 메모리 수요 증가 등을 기회로 보고 있다. 인텔의 차세대 CPU 출시 효과에 따른 D램 공급 증대 효과도 기대된다. 회사는 이에 대응해 구공정(레거시) 제품의 생산량은 조절하되 수요 성장을 주도할 선단 제품은 감산 없이 생산 규모를 최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한파에도 17조 원 투자…위기에 정면 승부=삼성전자가 ‘역대급’ 한파 속에서도 반도체 투자를 늘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경기 흐름에 민감한 반도체 업계는 업황 부진 시기에 상승기를 대비한 투자 확대가 필수적이다. 경쟁사들이 몸을 사리는 시점에 과감하게 투자를 늘려 중장기적인 상승기에 ‘초격차’를 이뤄 시장 리더십을 공고히 하겠다는 계산이다.
삼성전자가 1분기에 단행한 약 17조 원의 투자는 분기 기준 사상 최대다. 이 중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6조 5800억 원으로 1분기 영업이익(6400억 원)의 10배가 넘는다. 분기 이익이 14년 만에 1조 원 아래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기존 분기 최대 규모(6조 4700억 원)였던 지난해 4분기보다 투자액을 1000억 원 더 늘렸다.
시설 투자 또한 지난해 1분기(7조 9000억 원) 대비 35.4% 늘어난 10조 7000억 원을 집행했다. 이 중 91.6%인 9조 8000억 원을 반도체에 투자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연간 투자 규모를 역대 최대 수준이었던 지난해와 비슷하게 유지할 방침이다.
반도체는 공정이 미세화되고 선단 공정일수록 개발 난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만큼 R&D 단계부터 선제 투자를 강화하지 않으면 중장기 공급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반도체지원법 협상에도 참여할 뜻을 내비쳤다. 서병훈 삼성전자 부사장은 “미국 정부가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개별 기업과의 협상을 통해 구체화할 것이라고 밝혔다”며 “삼성전자도 이런 절차에 동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