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정책

조단위 투자, 정책금융 지원 절실한데…産銀, 배터리 지원도 손놨다

산은, 'SK온 설비투자 지원' 거절

산은 BIS비율 악화…운신의 폭 좁아져

정책금융 '전략산업 투자'도 흔들





SK그룹이 배터리 설비투자 자금 조달을 위해 한국산업은행에 대출을 요청했으나 사실상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은 적자의 늪에서 언제 빠져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업에 자금을 내줄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SK그룹이 자금 확보에 실패해 설비를 제때 확충하지 못하면 이미 수주한 물량을 중국 등 경쟁국 업체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30일 금융권과 재계에 따르면 SK는 최근 산은에 SK온의 배터리 설비투자를 위한 자금 대출을 요청했다. SK는 현재 80GWh 수준인 배터리 생산 능력을 5년여 후 300GWh까지 확대할 계획으로 이에 따라 연간 7조 원 수준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SK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조 단위 자금을 시중은행에서 융통하기 어려우니 결국 정책금융기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면서 “산은이 수출입은행 등 여타 정책금융기관보다 대출 여력이 큰 만큼 SK가 산은과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산은은 SK의 이 같은 요청에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산은은 특히 배터리 사업의 부진이 길어지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SK그룹 내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는 SK온은 지난해 1조 원 가까운 영업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올 1분기 들어서도 영업손실 4315억 원으로 분기 기준 최대 적자를 냈다.

SK온의 설비투자 대상이 대부분 해외 공장이라는 점도 산은이 대출을 꺼리는 이유로 알려졌다. 국내 투자와 달리 고용 증대 효과 등을 기대할 수 없는데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선뜻 돈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회사인 한국전력공사의 대규모 적자로 재무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산은의 운신 폭이 좁다는 지적도 있다.

문제는 SK가 적기에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예정된 설비 증설이 지연되면서 이미 수주한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납기를 제때 맞추지 못할 경우 발주사가 중국 등 경쟁국 업체로 선회해 산업 경쟁력이 퇴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정부 내에서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관계자는 “제조업의 특성상 사업 초기에는 수년간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시장 자체가 빠르게 커지고 있는 만큼 실적 반등은 결국 시간문제”라며 “(납기를 못 맞춰) 발주사가 이탈해 한 번 경쟁에서 뒤처지면 배터리 산업의 특성상 다시 따라잡기는 배로 힘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산은 관계자는 “특정 회사와의 논의 내용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SK온, 자금시장 경색에 SOS

산은 한전 적자에 부담 커 소극적



자금확보 늦어질수록 납기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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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경쟁력 퇴보 우려까지 나와

"단기 리스크 치중" 산은 비판도

SK온이 미국 최대 완성체 업체인 포드와 튀르키예에 합작공장을 세우려던 계획을 올해 2월 철회했다. 수도 앙카라 인근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2025년부터 많게는 연간 45GWh 규모의 물량을 생산해 유럽의 전기버스·트럭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결국 무산됐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파트너사에서 품질 문제를 우려한 점과 자금 확보가 쉽지 않았던 점 등이 두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사례는 자국을 넘어 해외로 발을 뻗어가는 중국의 광폭 행보와 대조된다. 중국 최대 배터리 업체 CATL이 독일 에르푸르트에 세운 공장은 지난해 말 가동을 시작했다.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1위에 오른 CATL의 첫 해외 공장이다. CATL은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 헝가리 등으로 거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배터리 업계의 한 인사는 “미국이 자국 땅에서 중국을 배척하는 기조가 이어진다면 각국 배터리 업체들은 남은 유럽 시장을 따내기 위해 격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시장을 우선 선점해야 하는데 중국의 막대한 자금력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자금 조달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정책금융기관인 한국산업은행조차 대출을 꺼리고 있다는 점이다. SK온은 지난해 초만 해도 상장 전 유치(프리IPO)로 4조 원을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지난해 말 한국투자프라이빗에쿼티(PE) 등 국내 사모펀드에서 1조 3000억 원을 유치하는 데 그쳤다. 한 해 7조 원 규모의 추가 설비투자 자금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데다 올 들어 경기 침체 폭마저 커져 자금 시장이 더 얼어붙은 터라 SK의 고민은 깊다. SK온은 MBK파트너스와 카타르투자청 등으로부터 상반기 내 최대 2조 원을 유치한다는 계획이지만 투자 조건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SK가 설비투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산은을 찾아간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SK가 내민 손을 선뜻 잡아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산은은 대외적으로는 SK온의 적자가 지속되고 있는 것과 해외 공장 증설은 국내 고용 증대 효과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자회사인 한국전력공사의 대규모 적자에 따른 재무 부담이 커 대출에 소극적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산은은 한전 지분 33%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한전의 적자는 지분법 평가에 따라 지분율만큼 산은의 손실로 잡힌다. 실제 지난해 한전의 순손실 24조 4199억 원 중 8조 원이 산은의 손실로 잡혔고 한전이 올 1분기에도 5조 원 규모의 적자를 낼 것으로 전망돼 추가 손실이 예고돼 있다.

SK온 사업의 반등 시점을 예단하기 어려운 점도 산은이 대출에 난색을 표하는 부분이다. 실제 SK온은 2020년을 흑자 전환 시점으로 목표했다가 이를 2년 뒤로 미뤘지만 지난해에도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매출을 내세우며 내년에는 흑자 전환을 자신하지만 그간 조 단위로 치솟은 누적 손실을 만회할 수준의 순익을 낼지 불투명하다. 이번 논의 과정에 밝은 한 인사는 “산은 측에서 SK하이닉스처럼 입지가 확실한 곳에는 대출을 고려할 수 있지만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에 자금을 대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산업의 특성상 개별 설비와 부품을 직접 운송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현지에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으며 해외 진출 시 국내 납품 업체와 공동으로 진출하는 형태라면 국내 기업 전반에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국가 첨단 전력 산업인 배터리 사업을 정책금융기관마저 외면한다면 어디서 자금을 조달하고 또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산은 관계자는 “특정 회사와의 논의 내용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 지연될수록 배터리 사업의 성장세가 꺾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SK온은 이미 수주해둔 물량에 맞춰 증설 계획을 세웠는데 자금 확보가 지연될수록 납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 업체가 국내 업체의 생산 공백을 메워 몸집을 더 키울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사업 초기 적자가 불가피한 산업 특성을 외면한 채 산은이 단기 리스크 관리에만 치중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국의 한 인사는 “중국은 저가형,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고품질 배터리에 강점이 있어 양국 간 경쟁 관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보급형 전기차 수요가 늘면서 저가형 배터리를 찾는 완성차 업체들이 증가하고 있어 중국의 시장 잠식 폭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우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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