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하루] 영락제, 해운을 그만두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1415년 10월 5일





오늘날 해양 세계에 대한 중국의 포부는 대단하다. 이른바 ‘해양굴기’를 기치로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치욕적이었던 역사를 되돌리려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대표적인 해양 국가인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해양굴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본래 중국이 해양 세계에 수세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송과 원나라 시대 중국의 해양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그 여파가 정화의 대원정으로 표출됐다.



그런 의미에서 1415년 10월 5일(음력 윤9월 3일)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재가한 결과로 나왔던 “파해운(罷海運)”, 즉 ‘해운을 그만두다’는 사료의 기록은 비록 세 글자로 간단하지만 그 파급력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을 발휘했다. 당시 영락제는 쿠데타로 황제에 올라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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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몽골족이 세운 식민도시(베이징)로 한족의 나라 명의 수도를 바꾸려 했기에 반대가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고, 베이징은 주변에 물산이 부족한 비자족 도시였다. 영락제는 쿠빌라이가 건설하려다 실패했던 장장 1800㎞에 달하는 대운하를 재건하는 길을 선택했고 고도 45m를 통과하는 대운하 유통망이 1415년 개통되자 보조적으로 활용하던 바다로의 물자 운송을 중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1415년 중지된 ‘해운’은 모든 해양 교역이 아니라 물자가 풍부한 양쯔강 하류의 강남(江南)에서 해운을 통해 베이징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은 결정 하나로 강남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황해 노선 대부분의 해양 교역이 침체됐고 그동안 축적한 원양 항해 관련 지식이 사장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조선의 연행사들은 위험한 해양 노선으로 난징까지 왕래하지 않는 대신 안전한 육로를 통해 베이징을 왕래하게 됐으므로 베이징 천도와 ‘파해운’을 반겼다.

위험한 모험 대신 안전한 일상을 선택한 결과는 자명했다. 단기적으로 비용을 아낄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혁신이 낯설게 됐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면서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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