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지구 기온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높였던 엘니뇨가 돌아온다. 지구 기온을 끌어올리고 남아시아·호주 등에 가뭄을 유발하는 이 현상의 귀환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전쟁 여파로 급등했다 가까스로 진정된 식량 가격이 다시 뛰어오를 것이라는 우려가 집중적으로 제기된다. 설탕·올리브유 등 일부 품목은 이미 기록적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7~9월 엘니뇨 발생확률 80%…"온난화 가속화하고 지구기온 기록 경신할 가능성 ↑"
최근 국제 기상 및 과학 기구들은 엘니뇨가 임박했다는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12일(현지 시간) 엘니뇨의 전조라 일컬어지는 켈빈파(Kevlin wave)가 적도 부근에서 형성돼 따뜻한 물을 서태평양에서 동태평양으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발표했다. 엘니뇨는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상황이 5개월 이상 지속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앞서 3일 세계기상기구(WMO)는 엘니뇨가 5~7월 나타날 확률이 60%에 이르며 7~9월에는 80%까지 늘어난다고 예측했다. 미 국립해양대기국(NOAA)도 11일 엘니뇨가 7월 전에 발생해 북반구 겨울까지 지속될 확률을 종전의 60%에서 82%로 올려 잡았다.
국제기구들이 2~7년마다 찾아오는 자연 현상인 엘니뇨의 발생 시점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엘니뇨의 유발 효과 때문이다. 엘니뇨는 지구 온도를 약 0.2도 높이고 호주·인도네시아·남아시아 일부 지역에는 가뭄을, 미국 남부와 아프리카 동부 등에는 폭우를 유발한다. 엘니뇨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2016년은 온실가스 효과가 겹치며 가장 더웠던 해로 기록됐다. 기후변화가 엘니뇨의 기온 상승 효과를 극대화하는 셈인데 기온 상승 억제 효과가 있는 라니냐가 2020년부터 3년간 이어졌음에도 최근 이상고온이 잇따르고 있어 우려가 더욱 크다.
또 NOAA에 따르면 3월 중순 이후 전 세계 해수면의 온도는 직전 엘니뇨가 있었던 2016년보다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WMO는 “엘니뇨가 발생하면 온난화는 가속화하고 지구 기온은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짚었다.
엘니뇨 영향권 남아시아는 벌써 이상고온…사탕수수·쌀·밀·야자 가격 상승 우려
엘니뇨의 핵심 영향권인 남아시아의 수은주는 벌써부터 치솟으며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13일 싱가포르의 낮 최고기온은 37도까지 올라갔다. 5월 기준 사상 최고다. 다른 국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베트남·라오스는 이달 초 기온이 각각 44.2도, 43.5도를 찍어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미얀마도 지난달 말 중남부 기온이 43도에 달했다. 필리핀은 5일 8개 지역에서 더위 수준이 체감온도 42~51도를 의미하는 ‘위험’ 단계에 다다랐고 인도에서는 지난달 집권 인도국민당 주최 행사에서 12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남아시아는 통상 4~5월이 혹서기로 꼽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폭염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세계 식량 공급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태국은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와 쌀·밀의 생산 대국이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팜유 원료인 야자(palm)의 세계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5%에 달한다. 전 세계가 이미 지난해 기록적인 ‘식량 인플레이션’을 겪은 상황에서 남아시아 국가들의 농작물 작황이 타격을 받을 경우 식량 가격이 또 뛰어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비료 업체인 모자이크의 조크 오로크 최고경영자(CEO)는 이달 초 “엘니뇨로 주요 지역의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농업 시장에 실질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인도 재무부는 엘니뇨가 자국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2016년 엘니뇨 당시 설탕 생산량은 예년에 비해 700만 톤 줄었다.
‘하락세’ 세계식량가격, 지난달 13개월만 올라…설탕·쌀·올리브유 등 가격 급등
이미 세계 식량 가격도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집계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159.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후 꾸준히 하락세였다. 하지만 지난달 127.2로 전월 대비 0.6% 상승해 13개월 만에 오름세로 전환했다. 지난달 설탕가격지수(149.4)가 인도·중국 생산량 전망 하향과 브라질 수확 지연 등으로 11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 쌀가격지수도 124.2로 3월과 비교해 2.5% 올랐으며 전년 대비로는 17.8%나 높았다. 최근 피치솔루션은 보고서에서 중국·파키스탄의 쌀 생산량이 지난해 홍수로 급감했다며 올해 쌀 부족량이 870만 톤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2003~2004년 이후 최대 규모다.
이뿐만이 아니다. 3월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올리브유 가격은 톤당 5989.7달러로 1997년 1월 이후 26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세계 최대 올리브유 생산국인 스페인의 생산량이 가뭄의 영향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예년의 절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북부 지역이 이례적인 기온 변화를 겪으며 지난달 말 중국 정저우상품거래소의 사과 선물 가격이 2주 동안 8% 급등했다.
태국, 농부들에게 “쌀 한 차례만 재배” 요청…FAO “극단적 기후 대비해야”
국제기구와 각국은 엘니뇨, 나아가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안보 대응에 돌입했다. 태국 매체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태국 당국은 최근 농부들에게 올해 쌀을 한 차례만 재배할 것을 요청했다. 쌀을 연 2~3회 재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한데 강우량 부족이 전망된다는 이유에서다. FAO는 각국에 엘니뇨로 인한 극단적인 강우·가뭄·더위 등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취약국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