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유전상담 아니면 평생 몰랐다" 40대에 신장 망가져 투석 시작한 원인

[메디컬인사이드]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

효소 부족해 체내 리소좀 축적…방치하면 신장·심장 등 주요 장기손상

효소대체요법 또는 먹는 약도 나와있지만 진단까지 평균 15.5년 소요

성염색체 통해 열성 유전…환자 진단되면 가족·친족도 검사 받아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신부전 환자 가운데 일부는 리소좀축적질환의 하나인 파브리병이 원인일 수 있다. 이미지투데이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신부전 환자 가운데 일부는 리소좀축적질환의 하나인 파브리병이 원인일 수 있다. 이미지투데이




“돌이켜보면 꽤 오래 전부터 신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푹푹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에도 땀이 전혀 나질 않는데 오한이 심해 벚꽃이 필 때까지 겨울 내복을 챙겨 입곤 했거든요. 손발이 저리고 때로는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파 밤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체질 탓만 했던 게 후회가 됩니다.”



서경제(46·가명) 씨는 격주로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를 찾는다. 서씨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40대 초반에 만성 신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느라 병원에 다니는 건 이골이 났지만 올 초 희귀질환인 ‘파브리병(Fabry disease)’이라는 진단을 받고 효소대체요법(ERT·Enzyme Replacement Therapy)을 시작하면서 병원을 찾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 진단까지 평균 15.5년…藥 있어도 몰라서 病 키우는 환자들


파브리병은 리소좀이라는 세포 내 소기관에서 당지질 대사에 관여하는 효소가 결핍돼 발생하는 리소좀 축적질환이다. 세포 내에 존재하는 리소좀은 세균 등 이물질 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브리병 환자는 α-갈락토시다아제(α-GAL A) 효소의 활성이 결여되거나 부족해 글라보오실세라마이드(GL-3)와 같이 대사되지 않은 당지질이 세포에 지속적으로 쌓이면서 피부·눈·뇌·말초신경·신장·심장 등 다양한 장기에 문제를 일으킨다. 완치 가능한 치료법이 없어 현재로선 부족한 효소를 보충하거나 대체해 각종 세포에 축적되는 지방을 줄이는 게 최선이다. 주사로 투여하는 ERT를 위해서는 2주에 1번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 최근에는 먹는 약도 도입됐다고 들었는데 보험급여 조건에 부합하질 않는 서씨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파브리병은 인구 11만 7000명 당 1명 꼴로 발생한다. 국내 환자는 200명 내외로, 미진단된 사례까지 포함하면 환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희귀질환은 전형적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아니면 의료진조차 의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브리병 환우회인 파브리코리아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파브리병 증상 발현 후 치료까지 평균 15.5년 가량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가장 많은 58%가 만 ‘20세 이전에 증상이 발현됐다’고 답했고 ‘만 40세 이후 치료를 시작했다’는 답변은 59%에 달했다. ERT는 미국, 유럽에서 20년 전 허가를 받았다. 치료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진단이 늦어지면서 악화되는 환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비정형성 파브리병은 α-GAL A 효소가 아예 결핍된 게 아니라 정상인보다 활성이 감소되어 있는 수준이라 전형적 증상이 없거나 가벼워 더욱 진단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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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조기 진단을 통해 일찍 효소대체요법을 시작하면 합병증 발생 시기를 늦추고 장기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단백뇨, 신장 기능 부전, 심장 기능 이상, 뇌혈관 이상과 같은 심각한 증상이 나타난 뒤에야 진단되는 환자들이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효소 활성도에 따라 파브리병 환자들이 겪는 증상은 다양하다. 대개 어릴 때부터 원인 모를 신경통이나 땀분비 이상, 안과와 피부 질환이 나타한다. 성인이 되면 신장과 심장 기능이 악화돼 비교적 젊은 나이에 뇌졸중, 신부전 등의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심장, 신장 등 주요 장기 손상이 나타나고 조기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병이다.

◇ 희귀질환 80%가량이 유전…가족·친척 검사로 조기 진단 가능


파브리병은 특징적 임상 증상 및 검사 소견 외에 가족력을 통해서도 진단이 가능하다. X염색체 연관성 열성으로 유전되는 질환이기 때문에 집안 남성 중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신장 질환이나 뇌졸중, 심질환 등을 겪은 사람이 있는 경우를 파악하고 백혈구, 혈장, 피부 조직의 섬유아 세포에서α-GAL A 효소의 활성을 측정해 확진할 수 있다.

서씨도 열한 살 외조카가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에서 파브리병 진단을 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어머니가 보인자였음을 파악한 이 교수가 유전상담사를 통해 가계도에서 파브리병이 의심되는 친족에게 검사를 권했고, 외삼촌인 서씨를 평생 괴롭혔던 원인이 파브리병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교수는 “10살 남짓 되는 나이에 파브리병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면 경과가 드라마틱하게 다르다”며 “외삼촌도 좀 더 일찍 진단됐더라면 투석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가 희귀유전질환의 조기진단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 중이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가 희귀유전질환의 조기진단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 중이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


촉박한 진료일정을 쪼개 환자의 가계도를 들여다 보고 가족검사를 권하고 유전상담사 육성에 힘을 쏟는 이유도 미진단된 파브리병 환자가 숨어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이 교수는 “희귀 유전질환으로 진단됐을 때 환자와 가족들의 충격은 상당하다”며 “진료 이외 시간에 유전상담사와 만나 필요한 상담을 받게 하고 같은 질환을 앓는 환자모임이나 지원제도 등을 소개해주면 충격을 덜어줄 뿐 아니라 또다른 환자의 진단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고 소개했다. 유전상담은 비단 파브리병 뿐 아니라 수천 가지 희귀 유전질환의 조기 진단율을 높일 수 있다. 매년 5월 23일은 희귀질환 극복의 날이다. 희귀질환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희귀질환의 예방·치료 및 관리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희귀질환은 8000여 종에 달하는데 대부분 유전적 소인이 있다”며 “희귀질환의 조기 진단을 위해서라도 유전상담과 리소좀축적질환에 대한 신생아 스크리닝검사 범위가 확대되는 등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안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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