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경영책임자의 사고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에서 근로자의 역할이 한껏 중요해진다. 중대재해법의 준수 조건인 ‘위험성 평가’에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근로자의 참여가 사실상 의무화되기 때문이다. 이 방식이 안착되면 경영계의 중대재해법 우려를 줄이는 동시에 노사가 사업장 안전 문화를 만드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21일 이 같은 내용과 방향의 사업장 위험성 평가에 대한 지침 개정안이 22일부터 시행된다고 밝혔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 규율된 위험성 평가는 사실상 현장에서 사문화됐다. 그러다 작년 1월27일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이후 중요성이 높아진 제도다. 위험성 평가가 산안법뿐만 아니라 중대재해법에서도 요구하는 안전보건체계 이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은 안전보건체계를 이행하지 않은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를 형사처벌하는 법이다.
고용부는 이번 개정안을 통해 위험성 평가를 노사가 쉽게 할 수 있도록 시기, 방식 등을 구체화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근로자가 위험성 평가 전 과정에 참여하도록 한 점이다. 현장에서 사고 위험 요인은 근로자가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현장 목소리를 반영한 결정이다. 고용부는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위험성 평가 적용 사업장 범위를 단계적으로 늘릴 방침이다.
근로자의 적극적인 위험성 평가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있다. 우선 근로자가 위험성 평가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장 환경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안전 일터 요구는 노동조합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4%에 불과하다.
더 큰 우려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책임 소재다.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서 안전예방 대책에 참여하는 상황이 두렵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는 중대재해법 시행에 따른 예정된 혼란이다. 이 법은 안전예방 대책을 소홀히 한 사업장과 경영책임자에게 사고 책임을 강하게 지우는 법리로 만들어졌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내가 위험성 평가를 했다가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을 함께 지는 것 아니냐’는 식의 우려가 사측 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류경희 고용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사업장 사고가 났을 때 위험성 평가를 한 근로자가 처벌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수사기관과 법원에도 위험성 평가를 한 근로자가 업무상 과실치사 위반 혐의가 적용되지 않도록 제도 취지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사가 위험성 평가를 적극적으로 할 경우 사업장 사고 예방 능력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전 정부의 산업안전 대책은 예방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강한 규제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중대재해법이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은 노사가 안전사고 예방에 힘을 쏟기 보다 경영책임자의 처벌을 피하는 데 급급한 부작용을 낳았다. 현 정권에서 고용부는 이런 상황이 누적되면 중대재해법의 시행 효과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업장 사고 원인과 예방책은 해당 사업장 노사가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판단으로 올해 중대재해 로드맵을 산안 대책 전면에 내세웠다. 로드맵은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를 벤치마킹했다. 한국처럼 과거 사망산재 공화국이란 오명을 썼던 영국은 로벤스 보고서의 핵심인 자기규율 체계를 안착시켜 사망산재를 크게 줄였다. 류 본부장은 “위험성 평가는 중대재해법 적용 사업장뿐만아니라 중소사업장이 지킬 수 있는 쉽고 간편한 방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