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앤지 알고도 나랑 친할 사람이 있을까. 아저씨 아버지는 뭐 하세요? 난 아저씨 아버지 뭐 하시는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왜 우리 아버지가 궁금할까. 잘 사는 집구석인지 못사는 집구석인지, 아버지 직업으로 간 보려고?’
몇 년 전 신드롬을 일으켰던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중 가수 아이유가 맡았던 이지안이라는 인물의 대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종이 한 장을 주시더니 탄원서라는 제목의 글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세상과는 멀어졌고 친구들로부터도 숨고 싶었습니다. 마치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수용자로 둔 어느 학생의 체험담 중 일부다. 학생은 가까운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도, 학교에서도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털어놨다.
두 사람은 서로 많이 닮았다.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어른이 가까이에 없었고 안전하게 살아갈 공간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정신적으로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피폐했다. 이지안이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의 인물인 것이다.
부의 대물림이나 직업의 대물림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그 대상이 부모가 가진 것, 좋은 것이라면 그래도 좀 낫다. 하지만 그것이 좋지 않은 것, 나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가난이나 범죄 같은 게 그것이다.
우리 헌법은 일체의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현실도 그럴까.
2020년 한국행정연구원에서 수용자 자녀에 대한 인식 조사를 했다. ‘수용자 자녀를 가까운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50% 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14%에 가까운 사람은 ‘절대로’ 이웃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어느 유명한 수용자의 출소 후 거주 지역을 놓고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는 모습이 보도되고는 한다. 대체로 성폭행범이나 강력범의 출소를 놓고 벌어지는 일이다. 자녀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용자의 자녀는 수용자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부모의 잘못으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격리돼 버리기 때문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이미 사회적 낙인이 찍혀버리는 것이다.
설문 결과는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심리적·정서적 연좌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범죄자 부모한테 뭘 배웠겠어’ ‘그 부모에 그 자식이지 뭐’ 이런 생각이다.
이지안은 어른다운 어른 ‘나의 아저씨’를 만나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실 속에도 여전히 ‘나의 아저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수용자의 자녀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