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 시스템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은 비은행 부문입니다.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지만 곳곳에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럴드 핑거(사진) 국제통화기금(IMF) 한국미션단장이 글로벌 경기 침체 속 부동산 익스포저가 있는 비은행 금융 부문을 한국 정부가 주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핑거 단장은 최근 워싱턴DC IMF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자산담보부 기업어음, 프로젝트파이낸싱 등 비은행 부문이 부동산 관련 문제에 노출돼 있을 수 있다”면서 “여기서 주의해야 할 취약점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미국이 올해 초 ‘은행 위기’로 홍역을 치른 가운데 핑거 단장은 한국의 은행 시스템에 대해서는 비교적 건전하며 우량한 자산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한국 경제의 리스크인 높은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은행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가계와 전세대출로 인한 시스템 리스크는 전반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주택 가격 하락 등 부동산 침체 문제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그는 “금리 상승과 높은 변동금리 부채 비중은 일부 가계의 재무적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주택 가격 하락으로 전세 보증금 상환과 관련된 신용 위험도 증가했다”고 언급했다.
핑거 단장은 한국 경제의 올해 성장률 전망과 관련해서는 조심스럽게 하반기 반등 가능성을 거론했다. IMF는 지난달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5%로 또 하향 조정했는데 이는 1년 전 전망치인 2.9%부터 지속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그는 “(한국 경제는) 반도체 침체 사이클에 발목이 잡혀 있고 낮은 글로벌 성장세가 제조업 분야에서 수출과 투자를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반도체 경기 개선 및 제로 코로나 정책 종료에 따른 중국의 경제 회복 가능성을 하반기 성장률 반등의 요인으로 지목했다. 특히 한국 경제의 키를 쥐고 있는 반도체 경기와 관련해 “(반도체) 산업은 스스로 작동하고 있다. 수요는 근본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대부분의 업계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에 반도체 경기가 호전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은행과 정부의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유동성과 정부 부채 감축 기조가 이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핵심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다”면서 “정책금리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고, 금리 인하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건전 재정 기조’에 대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핑거 단장은 아울러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기존의 공급망과 수출 시장을 조정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IMF는 앞서 세계경제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2개 블록으로 나눠질 경우 전 세계적으로 생산량(output)이 5년간 1% 감소할 수 있다고 봤다. 장기적으로는 2%대의 감소를 예측했다. 핑거 단장은 “한국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역 집약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그 손실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특정 공급망이나 수출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기업의 생존 리스크를 키울 수밖에 없다. 그는 “일부 수출 시장이 손상될 경우에 대비해 수출 시장을 더욱 탄력적으로 다변화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핑거 단장은 이 같은 미중 갈등 속에서도 인공지능(AI)과 전기차(EV) 시대가 열리는 것은 한국에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한국은 미국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그것은 전략적 첨단 기술 분야, 수출, 공급망에 대한 관여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