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돌조각이 덩그러니 있다. 정면에는 말 등에 올라탄 기사의 팔과 다리, 머리가 보이고 반대편으로 갈수록 말 머리로 이어지는 기사의 팔과 다리가 나타난다. 앞쪽은 말머리, 뒤쪽은 기사의 등이 표현돼 있지만 기이하게도 전체적인 형태는 좌우 대칭이 약간 맞지 않는 직육면체다. 다섯 면이 모두 다르게 묘사돼 있고 보는 각도에 따른 느낌이 달라 하나의 조각을 감상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다음 방에는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가진 조각상들이 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여성이다. 지금까지 본 여성의 조각상과 달리 위풍 당당하다. 마치 인체를 말하는 조각에는 남성과 여성이 따로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이자 한국 근현대조각의 선구자 권진규(1922~1973). 그의 조각들이 영원한 집을 찾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 관악구 남현동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에 권진규 상설전시장을 마련하고 1일부터 상설전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연다고 밝혔다.
이번 상설전시는 2021년 사단법인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이 미술관에 141점의 작품을 기증한 후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에르메스코리아의 후원과 함께 추진됐다. 이번 상설전시장 개장으로 권진규의 작품을 안정적으로 소개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오빠, 이제 새 집에 왔어…동생의 노력 끝에 모인 작품들
상설전시장 마련의 일등공신은 동생 권경숙 여사다. 권 여사는 오랜 시간 권진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해왔지만 쉽지 않았다. 작품을 기업에 양도했다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까지 건너가 작품을 직접 구입하는 등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되찾아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권 여사는 개막식에서 “(서울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아틀리에에서 이곳 권진규의 영원한 집까지 50분 거리인데 이 길을 꼬박 50년이라는 세월을 걸려서 왔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작가의 ‘영원성과’ ‘영원히 계속되는 전시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아 전시 제목을 ‘영원한 집’이라고 지었다.
도쿄에서 서울까지…거친 작품 세계 소개
전시 공간은 권진규가 손수 지은 아틀리에에서 볼 수 있는 문과 가구 등의 이미지를 반영해 꾸몄다. 관람객들이 마치 아틀리에에 방문한 듯한 기분이 들도록 아카이브용 가구도 원목으로 제작해 작품을 전시한다. 도쿄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다니던 1949~1956년 시기와 서울 아틀리에에서 지내던 1959~1973년 시기로 구분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동물상, 두상, 인체, 여성 흉상, 부조, 불상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될 뿐 아니라 지난해 같은 미술관에서 진행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에서 소개되지 않은 작품 제작 관련 자료와 사진도 대거 선보인다. 지난해 전시에서는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소장한 '말' 작품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작가의 드로잉 북을 영인본으로 제작해 관람객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 상설전시장에는 권 여사가 직접 등장하는 ‘나의 오빠, 권진규’ 영상과 작가의 주요 제작 기법 중 하나인 ‘건칠 작품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이 상영돼 관람객의 볼거리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