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에이전시 매니저의 삶을 그린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주인공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분)는 자신과 계약하겠다던 스타 선수에게 배신당한 뒤 “돈보다는 열정!”을 외친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선수이자 모두가 외면한 선수와 ‘계약 관계’가 아닌 ‘인간 관계’를 맺는다. 영화 말미에 두 사람은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뜨거운 포옹을 한다.
이 영화는 많은 스포츠 에이전시 매니저들의 마음에 ‘트리거’로 꼽힌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발사된 총알은 현재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대회장에서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국 곳곳, 대회장 안팎을 선수와 함께하는 ‘골프계 제리 맥과이어’들의 일상을 전지적 매니저 시점에서 들여다봤다.
푹 눌러쓴 모자와 까만 선글라스
선수 매니저 일일 체험을 위해 향한 곳은 KLPGA 투어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1라운드가 열린 경기 용인의 수원CC. 이가영, 이예원의 소속사인 매니지먼트 서울의 남민지 대표에게 미리 협조를 구한 뒤 대회장을 찾았다. 대회 개막 전날, 남 대표로부터 선수들의 티타임 1시간 반 전에는 대회장에 와있어야 한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아침부터 서둘러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장에서 만난 남 대표는 모자와 선글라스, 양산으로 햇볕을 가린 채 연습 그린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소속 선수인 이가영, 이예원의 퍼트 연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두 선수의 티타임은 각각 12시 5분, 12시 25분으로 오후 조에 편성됐다. 남 대표에게 다가가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신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남 대표는 “그래도 수도권에서 대회가 열려서 오늘은 편한 거예요”라고 했다. “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다 보니 매년 전국을 돌아다녀야 해요. 보통은 개막 하루 전에 대회가 열리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숙박을 하죠. 또 티타임이 오늘은 오후지만 오전일 때는 새벽에 해가 뜨기 전부터 대회장에서 선수와 함께합니다.”
그러고 보니 연습 그린 주변에는 남 대표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이 많았다. 다른 매니지먼트사의 매니저들이었는데 모두 모자를 썼고 검정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보조 가방을 메고 있었다. 대회 때마다 선수를 따라다니다 보니 햇빛으로부터 피부와 눈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조 가방 안에는 물과 선블록, 휴대폰 보조배터리 등이 있었다. 확실한 매니저 체험을 위해 차로 달려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겼다. 보조 가방은 카메라 가방으로 대체했다. 겉모습만은 골프 선수의 매니저로 손색이 없게 준비를 마쳤다.
“기대되고 떨리고 설렌다”
연습 그린에 있던 이가영과 오늘 컨디션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1번 홀 티잉 구역으로 이동하던 중 남 대표가 말했다. “기대된다. 떨린다. 이번 대회는 또 어떨까.” 벌써 8년째 많은 선수들과 거의 매 대회를 함께하는 중이지만 남 대표는 여전히 대회 첫 티샷을 앞두고 설렌다고 했다. 12시 5분. 선수 소개와 함께 이가영이 첫 티샷을 날렸다. 이어 12시 25분. 이예원의 첫 홀 티샷을 지켜본 뒤 먼저 출발한 이가영 조를 뒤따랐다.
1번 홀에서 버디를 잡고 기분 좋게 출발한 이가영을 3번 홀에서 만났다. 같은 조에는 KLPGA 투어 통산 5승의 이소미와 데뷔 2년 차 고지우가 함께 묶였다. 2019년 KLPGA 투어에 데뷔한 이가영은 데뷔 4년 차이던 지난해 98번째 출전 대회 만에 생애 첫 우승을 달성했다.
남 대표와 선수를 따라 걷던 중 일일 매니저로서 지시 받은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선수를 앞서지 않고 뒤를 따라야 할 것, 매 홀 선수의 샷을 유심히 지켜보며 경기력을 살필 것, 선수가 필요로 할 때 간식을 공급할 것 등이었다.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의 플레이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팬과 함께, 선수와 함께
이가영을 따라 걷다 보니 초록색 옷을 맞춰 입은 무리가 눈에 띄었다. 이가영의 팬클럽인 ‘가영동화’ 회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티샷, 세컨드 샷, 어프로치, 퍼팅 등 이가영의 모든 플레이 뒤에는 이들의 박수와 응원이 따랐다. 담당하는 선수가 팬들의 응원 속에서 플레이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4번 홀에서 이가영의 버디가 나오자 다음 홀로 이동하는 길에서 하이파이브 릴레이가 이어졌다.
팬클럽 회원들과 하이파이브를 마친 남 대표는 “저분들이 계셔서 정말 큰 힘이 된다. 워낙 베테랑들이다 보니 선수가 샷을 하기 전에 갤러리 소음이나 이동을 통제하면서 매니저 역할까지 한다”면서 “특히 같은 조에서 플레이하는 다른 선수들의 응원까지 해서 정말 보기 좋다”고 했다. 실제로 이들은 1번 홀 티샷을 앞둔 이소미와 고지우가 소개되자 큰 소리로 이름을 외쳤고 경기 중 버디가 나왔을 때는 “나이스 버디”로 칭찬했다.
이가영 조를 따라 9홀을 돈 뒤 갤러리 플라자에 앉아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약 20분의 꿀 같은 휴식이 끝난 후 후반 홀에 접어든 이예원 조를 따라 나섰다. 후반 첫 홀인 10번 홀을 지나쳤고 11번 홀에서 이예원을 만났다. 첫 홀 버디 이후 9개 홀 연속 파를 거듭한 이예원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버디 퍼트를 놓치며 지루한 파 행진이 이어졌고 응원하던 갤러리들도 고요해졌다. 15번 홀까지 14개 홀을 연속해서 파로 마무리하자 남 대표가 정적을 깼다. “나이스 파! 잘했어, 잘했어!” 다음 홀로 향하는 이예원에게 다가간 남 대표는 “괜찮아, 괜찮아”라며 다독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예원은 16번, 17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아냈다. 3언더파를 적어낸 이예원은 선두 그룹과 3타차 공동 17위로 1라운드를 마쳤다.
이예원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먼저 경기를 마친 이가영의 스코어를 KLPGA 투어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인했다. 이예원과 같은 3언더파 공동 17위. 버디 6개를 낚았지만 보기 1개와 더블 보기 1개가 아쉬웠다. “에휴”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침 스코어카드를 제출하고 나오는 이예원을 에스코트하며 다시 연습 그린으로 돌아갔다. 올 시즌 KLPGA 투어 개막전 우승자답게 많은 팬들이 이예원에게 사인과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또 한 번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마지막 홀 더블 보기를 범한 이가영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연습 그린에서 연습을 마친 이가영은 남 대표에게 달려와 18번 홀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 집중력을 잃었던 것 같아요. 퍼트를 다 하고 보니 스리 퍼트였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캐디에게 ‘나 더블 보기지?’라고 물어봤을 정도였어요.” 남 대표와 눈이 마주친 이가영은 이내 털털하게 웃어 넘겼다. 그리고 이가영을 클럽하우스 앞에 대기 중인 차량까지 배웅했다. 대회장을 떠나기 전 이가영의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와 미소에 매니저로서의 뿌듯한 감정을 얕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12.74㎞, 18458걸음
일일 매니저 체험을 마무리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대회 취재가 아닌 이유로 18홀을 걸어서 다 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회장 도착 후부터 켜놨던 만보기에는 12.74㎞, 18458걸음이 찍혀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메라 가방에 넣어뒀던 500㎖ 생수 2개는 이미 빈 통 됐고 옷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특히 체력만큼이나 고갈된 것은 정신력이었다. 담당 선수에게만 하루 종일 온전히 집중한다는 게 굉장한 정신력을 요했다. 또 주변 소음에 혹시 선수의 샷이 무너지거나 선수의 안색이 변하지는 않는지 살피는 일 등 세심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간절히 바라던 버디가 나오지 않았을 때 선수들의 감정은 어떨지 생각해 보니 담당 매니저로서 감정이입이 되는 느낌이었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1인, 그리고 제리 맥과이어를 ‘인생 영화’로 꼽는 기자에게 이번 체험은 설레는 도전이었다. 체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토이의 대표곡 ‘좋은 사람’이 절로 흥얼거려졌다.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늘 너의 뒤에서 늘 널 바라보는 그게 내가 가진 몫인 것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