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 가해자에 대한 신상 공개 확대 방안을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법원도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의자에 대한 신상 공개를 명령했다. 국회에서도 재범 방지·국민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자 얼굴 등을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의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돼 있어 향후 여성을 겨냥한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실 청사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대수비회의)에서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 가해자의 신상공개 확대 방안을 신속히 추진하라”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그동안 대수비회의에서 주로 민생·경제현안을 다뤘던 윤 대통령이 형사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건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강력범죄에 대한 기존 사법적 대응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피의자의 신원은 공개할 수 있는데 피고인의 신원을 공개할 수 있는지는 적법성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입법 사안이라 논의해야 한다”며 여야 정치권의 동참을 강조했다. 이어 “법안의 구체적 조항에 대해서는 법무부에서 할 것”이라며 “아당에서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죄질이 좋지 않은 피고인에 대한 신상 공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건 지난해 5월 부산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뒤를 쫓아가 무차별 폭행을 가한 ‘부산 돌려차기남’ A 씨에 대한 신상을 유튜버와 김민석 서울 강서구의원 등이 공개하고부터다.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 운용 중인 ‘피의자 신상 공개’ 제도는 중대범죄 발생 시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제도다. 특정강력범죄법 2조·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2조에 해당하는 범죄에 한해 신상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A 씨의 경우 수사 단계에서 ‘중상해죄’만 적용돼 신상공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피해자 호소에도 불구하고 신상 공개 필요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강간살인미수 혐의가 2심을 앞두고 A 씨에게 적용되면서 A 씨의 신상 정보도 공개되지 못한 셈이다. 결국 뒤늦은 혐의 적용으로 외부로 밝혀지지 않았던 A 씨 얼굴 등 신상은 항소심 재판부 결정에 따라 공개된다.
부산고법 형사2-1부(최환 부장판사)는 이날 피고인 A 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1심보다 8년 더 무거운 징역 20년을 선고하면서 △10년간 정보통신망 신상 공개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 취업제한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도 명령했다. 여기에 20대 또래 여성을 살해 후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정유정 사진이 실물과 너무 다르다는 등 신상 공개 실효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이 ‘얼굴 등 신상 정보를 자세히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의 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을 최근 쏟아내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은 ‘신상 공개 결정이 난 시점부터 30일 이내의 피의자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을 지난달 25일 대표 발의했다. 같은 당 박덕흠 의원도 해당 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신상 공개 때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방안을 담았다. 이외에도 피의자 얼굴은 수사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영상물로 공개해야 한다거나 대상은 아동학대 살해 피의자, 장애인 학대 범죄 가해자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이 올 들어 발의된 바 있다.
전문가들도 신상 공개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정부·국회 측 움직임에 긍정적 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수사 단계에서 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피의자에 대해서는 국민의 알 권리나 재범 방지 차원에서 얼굴 등 신상을 한층 자세히 공개해야 한다는 취지다. 게다가 기존에 공개되는 사진만으로는 피의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머그샷(mug shot·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인권, 무죄 추정의 원칙 등은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 공개를 확대하는 데 넘어야 할 산으로 지적된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는 “피의자보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서 더 벗어난 피고인의 신상 공개가 안 되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며 “수사 단계에서 강력 범죄 혐의가 확인되면 검찰도 적극적으로 신상 공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신상 공개는 엄격한 요건하에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것인데 무작정 확대할 경우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하게 될 우려뿐 아니라 엉뚱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