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의 처벌 부담을 줄이는 '필수의료 사고처리 특례법' 제정을 예고한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를 지지하는 법안이 또 나왔다. 중증 환자를 치료할수록 의료사고로 인한 형사처벌 위험이 커지는 필수의료 분야 기피현상을 해소하려면 의료진이 아닌,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은 14일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제정법)을 대표 발의하고 국회 소통회관에서 의료계와 함께 '필수의료 살리기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정근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 박근태 대한내과의사회 회장,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손문성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부회장, 김 현 대한응급의학회 기획이사, 강민구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이 동석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번에 신 의원이 내놓은 일명 '필수의료 국가책임법'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신경과, 응급의학과 등 필수의료 분야 의료진과 수련을 받는 레지던트(전공의)들의 의견이 담겼다. ‘필수의료’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는 의료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2조와 8조를 통해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분야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 또는 장애가 발생할 수 있는 의료영역’ 또는 ‘지리적 문제 또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인하여 의료 공백이 발생되거나 발생이 예상되는 의료영역’으로 규정한 점이 특징이다. 구체적인 우선순위는 ‘필수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하도록 했다. 모든 국민이 성별·나이·민족·종교·사회적 신분·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필수의료를 제공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인 필수의료를 제공하도록 하는 책무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부여하는 내용도 담겼다. 응급 환자가 구급차를 타고 치료할 병원을 찾아 전전하다 숨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재발을 막으려면 3년마다 필수의료 종합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는 한편, ‘필수의료종사자의 전문성 향상, 근무환경 개선, 합리적 보상체계 마련에 관한 사항’을 종합계획에 포함시켜 이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골자다.
특히 필수의료 종사자 양성 및 전공의 수련비용은 물론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 보상비용을 국가가 지원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료진의 형사 처벌을 감경, 면제하는 대신 필수의료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한 것이다. 이는 필수의료 붕괴의 근본 원인이 의료사고로 인한 소송과 분쟁 위험이 높은 진료과를 선택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는 의료계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신현영 의원은 “최근 무과실 분만사고 100% 국가책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며 필수의료 살리기를 향한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서울아산병원 뇌출혈 간호사 사망사건, 소아과 오픈런 현상, 응급실 표류 사망사고 등 이미 심각한 수준의 필수의료 붕괴현상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며 “더 이상의 피해사례가 속출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 필수의료체계의 대대적인 개선안을 마련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의원은 가톨릭관동대의대를 졸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다.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과장을 역임했고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 당시 긴급 출동한 명지병원 재난의료재난팀(DMAT) 차량에 탑승해 현장 도착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필수의료 지원을 주장하는 의료계 인사들은 이번 법안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정근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은 "의협은 무너져가는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필수의료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는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적극 환영한다"며 "의료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는 의료분쟁으로 인해 환자와 의료인 모두가 정신적,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와 고통을 겪어온 만큼 이에 대한 법적 부담을 경감하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고의성이 없는 의료사고 발생 가능성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의료인들을 위해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의료인이 구속되고 형사 처벌을 받는 일이 반복된다면 위험 부담이 큰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더 심화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중증·응급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란 것이다. 김재유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최근 필수의료 지원 대책으로 수가 등 보상책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의사들이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돈 문제는 아니다"라며 "의료진 과실이 없는 분만사고 보상을 전액 국가가 책임지는 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한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료진 과실 범위를 정하는 가이드라인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의협과 합의한 '필수의료사고처리특례법'을 두고도 일부 시민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 단체는 의료과실을 입증하기 어려워 실제로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의사들이 당연히 져야 할 기본 책임조차 회피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앞서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지난 2월 복지부가 '필수의료 지원대책'의 예시로 의료인 의료사고 형사 처벌 면제 특례법 제정이 언급된 것과 관련해 "의료인 의료사고 형사 처벌 면제 특례법 제정 논의를 추진하려는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의료인 의료사고 형사 처벌 면제 특례법 제정 논의가 아닌 의료인 의료사고 설명의무법, 의료사고 입증책임 전환법 등 의료사고 피해자와 유족의 울분을 풀어주고, 입증 부담을 완화하는 입법적 조치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