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회·정당·정책

[기자의 눈]한국에 드리워진 '마니 풀리테'의 그림자





1992년 이탈리아 검찰은 대대적인 부정부패 척결 작업에 착수한다. 시작은 미약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은 당시 연립 여당이던 사회당의 하급 간부 집을 압수 수색해 현금 700만 리라(약 400만 원)를 찾아낸다. 이탈리아 정치권을 송두리째 바꾼 부정부패 척결 작업인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의 출발점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부패의 실타래’가 드러났다. 여야 중 누구의 책임을 물어야 할지 나누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부정적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자 상원은 부패 관련 ‘면책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사건은 전직 총리 등 4600명을 구속하고 국회의원 절반을 기소하고 나서야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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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 국회의 모습은 30여 년 전 이탈리아의 전례를 그대로 밟아가는 듯하다. 한 번도 당선된 적 없던 한 원외 정치인의 개인 비리 의혹은 대한민국 제1야당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의 ‘게이트급 사건’으로 비화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말을 빌린다면 전직 당수와 함께 현역 의원만 22명이 연루된 대규모 정치 스캔들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다. 검찰이 어떤 증거·증언을 들이밀어도 ‘표적 수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읊조린다. 피의자가 된 동료 의원들의 체포 영장 적절성에 대해 법원 판단을 받는 것조차도 민주당은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절대 다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으로 가는 길목을 익명성에 기댄 투표(체포동의안 표결)를 통해 연이어 차단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구속영장이 청구된 5명의 의원 중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4명은 모두 민주당계다. 당사자들은 검찰 수사는 물론 법원의 판단도 받지 않겠다면서 “재판에서 결백을 밝히겠다”는 앞뒤 안 맞는 태도로 일관한다.

“불체포특권은 공익을 위한 것이다. 법 앞에 평등한 나라에서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수사에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

2020년 9월 같은 당 정정순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가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남긴 글이다. 구속 기로에 선 동료 의원을 향해 냉철한 원칙론을 내세운 그의 결기는 어디로 갔을까. 이 대표의 태도 변화를 자신이 피의자가 된 현실과 떼어 놓고 볼 수 있을까. 여론에 떠밀려 면책특권이 박탈됐던 마니 풀리테에 한국 정치권이 겹쳐 보이는 시점이다.


이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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