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1970∼1990년대 초반 오염된 혈액 제제와 수혈로 3만명 이상이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나 C형 간염에 걸렸고 약 3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돼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오염된 혈액 제제의 일부는 미국 교도소 수감자나 마약 사용자 등 고위험 헌혈자의 혈장으로 제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20일(현지시간) AP·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영국 오염혈액조사위원회는 이날 발표한 최종 보고서에서 국가의 잘못으로 많은 환자가 오염된 혈액 제제와 수혈에 노출됐으며 정부는 오히려 이를 은폐했다고 비판했다.
위원장인 브라이언 랭스태프 전 판사는 "이 재난은 사고가 아니었고 의사와 혈액 서비스 담당, 정부 등 당국이 환자 안전을 최우선시하지 않은 결과"라며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피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가운데는 혈우병을 비롯해 피가 잘 멎지 않는 질환을 앓은 환자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이런 환자들은 미국에서 수입된 치료제를 투여받았는데 일부는 교도소 수감자나 마약 사용자 등 고위험 헌혈자의 혈장으로 제조된 것이었다.
출산이나 수술, 치료 중에 수혈했던 사람들도 오염된 혈액으로 피해를 본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1250명이 HIV에 오염된 혈액 제제로 감염됐고 그중 약 ¾이 사망했다.
혈액 제제 투여 후 만성 C형 간염에 걸린 환자는 5000명에 육박했으며 수혈을 받고 이에 감염된 피해자는 2만6800명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1940년대에 간염, 1980년대 초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이 혈액으로 전염될 가능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정부가 제대로 조처했더라면 많은 사례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당국이 헌혈자와 혈액 제제를 엄격히 선별하지 못했고 감염 사실이 파악됐을 때 피해자에게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안심시켰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해자 가족 샘 러시비는 일간 더타임스에 아버지가 혈우병 치료 후 HIV에 감염됐고 이를 모른 채 임신 중인 어머니에게 전염시켰다고 말했다. 태어난 누이는 4개월에 숨졌고 어머니는 몇 년 뒤 23세에, 아버지는 그 뒤 34세에 사망했다.
러시비는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뉴스에 정치인들이 나오면 왜 화를 내는지 물었고 이때 할아버지가 "그들이 네 부모와 누이를 죽였기 때문이지. 정부가 네 가족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리시 수낵 총리는 이날 중으로 사과할 예정이며 정부는 총 100억 파운드(17조3000억원) 규모의 보상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영국 언론은 전했다.
지난 수십년간 법정 소송이나 조사 등이 있었으나 피해자들은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정부에 공식 조사를 요구했고 2017년 7월 공식 조사 계획이 발표됐다.
조사위는 영국 전역의 피해자 증언 수집을 거쳐 2022년 7월과 지난해 4월 두 차례 중간보고서를 내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보상을 강하게 권고했다.
이후 정부가 '도덕적 책임'을 인정해 제시한 1인당 1만 파운드(약 1천720만원)의 중간 보상금은 생존자와 유족 약 4000명에게 지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