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직 국무장관으로서 5년 만에 중국을 찾은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방중 성패는 사실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예방 성사 여부에 달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번 방문이 두 나라 긴장 관계에서 일종의 마지막 금지선(레드라인)을 설정하는 성격인 만큼 구체적인 회담 성과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오히려 중국 측의 성의 표시가 앞으로의 미중 관계에 대해 더 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8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은 블링컨 장관이 이날 중국을 방문해 친강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했다고 전했다. 블링컨의 이번 방문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의 회담의 후속 작업 차원이다. 애초 올 2월 방중이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당시 미국 상공에서 발견된 정찰풍선 사태로 인해 연기됐다. 미국 현직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때인 2018년 마이크 폼페이오의 방문 이후 5년 만이다.
두 장관은 회담에서 두 나라의 갈등이 우발적인 무력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이른바 ‘가드레일(안전장치)’을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중국 측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다시 한번 전달한 것으로 관측된다. 더불어 미국이 일본과 한국·필리핀·호주 등 아시아 지역 강대국들과 안보 관계를 강화하는 데 대한 불만 역시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앞서 블링컨 장관의 이번 방중 목표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이는 △양국 관계에서 중요한 과제 논의 △오해 해소 △양국의 경쟁이 갈등으로 치닫지 않기 위한 소통 채널 구축이다. 에반 메데이로스 조지타운대 교수는 “이번 일정의 목표는 미중 소통 재개이며 화해나 긴장 완화(데탕트·detente)가 아니다”라며 “두 나라의 유대가 자유낙하하는 상황을 일단 멈추고 안정을 위한 바닥을 찾자는 것이기 때문에 회담의 성과나 성공 여부를 논하기에는 이른 단계”라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중국의 핵심 관심사는 경제 이슈에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미국은 중국을 반도체 등 핵심 산업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개념인 디커플링(탈동조화)을 대체할 새 용어로 디리스킹(위험 경감)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와 무역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을 일종의 리스크로 보고 이를 완화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공급망 재편이나 통상 제한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국이 예의 주시하는 부분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은 외교적으로 자신감과 독립성을 내세우지만 경기 둔화와 청년 실업 급증, 투자 감소에 직면해 미국과의 오랜 교착 상태를 감당할 수 없다”며 “중국은 첨단 기술 제한 등 경제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고위급 인사들과 논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이번 회담을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데이비드 달러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블링컨 장관의 후속 일정으로는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의 후속 방문이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결과”라고 말했다.
당장의 관심은 19일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을 예방할지 여부다. 현재까지 알려진 블링컨 장관의 방중 일정은 이날 친 부장에 이어 19일 중국 외교 라인 1인자인 왕이 외사공작위원회 주임(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의 회동이다. FT는 중국 전문가를 인용해 “미국 국무장관보다 자국 내 영향력이 적은 친 부장이나 왕 위원만 보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일종의 외교적 모욕”이라고 평가했다. 시 주석과의 회담 여부도 결국 경제 이슈에 대한 중국의 판단에 달렸다는 분석도 있다.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최고 중국 전문가인 데니스 와일더는 “만약 시 주석이 블링컨 장관을 만나지 않는다면 중국이 미국의 디리스킹 전략을 우려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을 예방할 경우 제2차 바이든·시진핑 회담에 대한 논의도 시작될 수 있다. 예방 자리에서 11월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하고 이를 계기로 양국 정상의 2차 회담을 위한 의사 교환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에게 우크라이나 전쟁 중단과 관련한 중재를 요청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이 통상 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러시아가 한발 물러서도록 중국의 역할을 요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