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원전 강국의 마지막 퍼즐

권구찬 백상경제연구원 부국장

핵 연료 자급커녕 재활용도 못해

日수준 ‘핵권리’ 요구할 명분 넘쳐

신냉전·美 인태전략 지렛대 삼아

‘한미원자력협정’ 족쇄를 풀 호기

백상경제연구원 부국장대우백상경제연구원 부국장대우




1976년 착공한 월성 원자력발전소는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 25기 가운데 유일한 중수로(重水爐) 기반 원전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경수로인 고리 원전의 전례를 깨고 캐나다로부터 중수로 기술을 들여온 이유는 특별했다. 중수로는 저농축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는 경수로와 달리 천연 우라늄을 장전한다. 앞서 미국은 핵 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우리나라에 원전 기술을 이전하면서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우리는 우라늄을 농축할 수 없어 예나 지금이나 핵연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중수로의 또 다른 특징은 경수로보다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혹은 재활용이 용이하다는 데 있다. 재처리는 우라늄과 저순도 플루토늄을 뽑아내 핵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핵폭탄의 원료인 고순도 플루토늄까지 추출할 수 있다. 독자 핵무장론자들이 월성 중수로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혜안이라고 치켜세우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월성 원전을 되돌아본 것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과 대외 경제 여건이 반세기 전 원전 개발 초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냉전 격화와 중동발 오일쇼크가 덮쳤던 게 1970년대라면 지금은 신냉전 시대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대만의 양안 갈등은 동서 진영 대결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지난겨울 겪었던 러시아발 가스요금 대란은 옛 오일쇼크를 떠올리게 한다. 글로벌 분업 체계도 허물어져 이제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공급망을 재편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세계 최대 핵연료 수출국인 것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러시아 수입 의존도는 30%쯤 된다.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만약 수출한다면 핵연료 금수 조치가 러시아의 보복 카드 1순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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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원전 산업은 짧은 기간에 독보적 지위를 확보했다. 기술력은 차세대 한국형 원전을 해외에 수출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 설비용량은 세계 5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연료 자급은 고사하고 폐기물을 10% 이하로 줄이고 핵연료로 다시 쓰는 재활용은 언감생심이다. 원전 기술 이전 창구였던 한미원자력협정이 ‘핵 활용권’을 가로막는 족쇄가 된 형국이다. 이웃 나라 일본은 20% 이하 저농도 우라늄 농축을 자유롭게 하고 사용후핵연료의 재활용도 가능하다.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시설을 확보한 일본은 핵연료 생산과 재활용의 순환 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았다. 심지어 일본은 전술핵무기를 최소 1000발 이상 만들 수 있는 핵 물질을 쌓아두고 있다.

양국의 차이는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평화헌법을 제정한 측면도 있지만 우리의 패착도 있다. 박정희 정부 때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다 홍역을 치렀고 극소량의 우라늄 농축 실험을 하다 2004년 하마터면 유엔 제재를 받을 뻔했다. 반대로 일본은 영민했다. 일본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하자 핵폐기물을 영국과 프랑스에 위탁 재처리하는 묘안으로 핵 확산을 우려한 미국을 안심시켰다.

우라늄 농축은 원전 강국으로 가는 마지막 퍼즐의 한 조각이다. 무기급 90% 이상 고농축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일본 수준의 20% 저농축으로도 충분하다. 이 정도면 핵추진잠수함(SSN)까지 확보할 수 있다. 북한의 핵 무력이 사실상 완성 단계이고 우리나라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본격 참여를 앞둔 현시점이야말로 ‘핵 족쇄’를 풀기 위한 더 없는 기회다. 미국은 최근 인태전략 강화 차원에서 호주에 핵잠수함 수출을 결정했다.

핵무장이 아닌 한 일본 수준의 핵 권리를 요구할 전략적 명분은 차고 넘친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핵 확산 금지를 재확인하지 않았는가. 마침 오늘(19일)은 고리 원전 1호기가 상업 운전에 앞서 1977년 처음으로 핵분열을 일으킨 날이다. 46년 전 원자로 첫 점화에 환호성을 터뜨렸던 과학자들이 그때의 족쇄가 반세기가량 채워지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권구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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