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을 끌어 온 '백선기 경사 피살사건'의 범인이 대전 은행 권총 강도 사건을 저지른 이정학(52)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최근까지도 별다른 단서가 없어 영구 미제로 남는 듯했으나 최근 공범의 결정적 제보 덕분에 수사가 속도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제보 이후 증거 수집과 진술 확보를 통해 이정학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지난 22일 전북경찰청 백 경사 피살사건 전담수사팀은 강도살인 혐의로 이정학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북경찰청에 따르면 2002년 9월 20일 0시 44분께 이정학은 전주북부경찰서(현 덕진경찰서) 금암2파출소 건물 뒷쪽 담을 넘어 후문으로 침입해 백 경사(당시 54세)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그가 소지한 38구경 총기를 탈취했다. 이 총기에는 실탄 4발과 공포탄 1발이 장전돼 있었다. 이정학은 곧바로 파출소 후문으로 다시 도주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경찰은 대대적 수사팀을 꾸려 300여명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를 진행했다. 별다른 소득이 없던 와중에 2003년 1월 전주의 한 음식점에서 절도를 저지른 20대 3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알고 보니 과거 이들은 백 경사 단속에 적발돼 오토바이를 압류당한 전력이 있었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백 경사를 살해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현장검증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진술을 번복했다. 경찰의 강압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며 자신들은 백 경사 피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수사도 더 진행할 수 없게 됐다. 경찰은 결정적 증거인 권총을 찾기 위해 공을 들였으나 여러 차례 수색에도 허탕을 치며 20년 넘게 범인을 붙잡지 못해 장기 미제사건으로 분류됐다.
그러다가 지난 2월 경찰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대전 은행 강도살인 사건'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이승만(53)이었다. 이승만은 '백 경사 총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며 울산의 한 모텔방을 언급했다.
경찰은 이승만의 편지가 믿을 만하다고 보고 지난 3월 3일 그곳을 수색한 결과 천장에서 백 경사의 것과 일련번호가 같은 권총을 찾았다. 이승만은 백 경사를 살해한 인물로 자신과 같이 은행 강도를 저질러 징역 20년을 받은 이정학을 지목했다.
앞서 이정학은 논산을 거쳐 대전으로 국도를 타고 도주했고 도주 중 논산에 잠시 정차한 뒤 농수로에 흉기를 버린 것으로 파악됐다. 훔친 총기는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공동 피고인 이승만에게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총기를 넘겨받은 이승만은 5번 정도 총기를 옮겨 보관했으며 울산의 한 모델에서 생활하면서 이곳에 숨겨 둔 것으로 파악했다.
이정학은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자신을 찾아온 수사관에게도 백 경사를 살해하지 않았다면서 이승만의 증언이 허위라고 주장하며 그에게 범행을 떠넘겼다.
그러나 경찰은 △이승만의 증언이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점 △이정학의 번복된 진술에 모순이 있는 점 △총기가 울산에서 발견된 경위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상흔 및 침입 흔적 등 여러 증거와 진술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정학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결론냈다.
경찰은 수감 중인 이승만과 이정학을 여러 차례 만나 각자 진술을 검증하고 방대한 과거 사건 자료를 분석했다. 수사 전문가들이 114일간 증거와 진술을 분석한 끝에 파출소에서 경찰관을 살해한 범인의 모습을 밝혀냈다.
이후신 전북경찰청 형사과장은 22일 사건 브리핑에 앞서 "21년 전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명복을 빈다"며 "유족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경찰은 사건 당시 현장 상황과 제보자 진술이 일치한 점 등을 감안해 이정학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짓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전북경찰청 관계자는 “피의자는 계속 말을 바꾸며 현재까지도 자신은 경찰관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진술에서 여러 모순점을 발견했고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확보한 증거물과 진술 등을 근거로 사건을 송치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정학과 이승만은 2001년 12월 21일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수송차를 가로막고 은행 출납과장 김모씨(당시 45세)를 38구경 권총으로 쏴 살해한 후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