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국무총리 연설문 21년…“중년의 글쓰기, 자기 이해와 세대 공감”

■서광식 수필가

가난에 상금 노리고 도전한 백일장서 '장원'

기자 생활 후 1996년 국무총리 공보관 이동

이수성 총리부터 21년간 17명 연설문 맡아

"글, 포장·과장 걷어내면 자연스러워져"

아들도 문학도…2011년 父子시집 펴내


1979년 제1회 ‘만해백일장’이 열렸다. 당시 고3이던 서광식(62·사진)씨도 출전했다. ‘쌀이 다 떨어졌다’는 부모님의 속삭임을 뒤로 하고 단칸방을 나섰다. 그날 그는 시 부문 중고등부 장원에 올랐다.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외부 활동을 하면 퇴학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도 퇴학당할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손엔 장원에게 주어진 상금 10만 원이 있었다. 1970년 40㎏ 쌀자루가 2880원이었다. 10만 원은 온 식구가 몇 달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문학을 좋아하던 까까머리 소년은 ‘글도 돈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원고지 칸수를 메우며 살고 싶다’고 꿈꿨다. 그 후 글 쓰는 일이 밥벌이가 됐다. 2017년 퇴직하기까지 ‘내’ 글을 쓰는 대신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연설문 작성가)로 21년을 살았다. 라이프점프는 지난 21일 서울 종로 본사에서 퇴직 후에 수필가로 등단해 비로소 자신의 글을 쓰게 된 서광식씨를 만났다.





지난 21일 서울 종로 본사에서 서광식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하고 있다. / 정예지 기자지난 21일 서울 종로 본사에서 서광식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하고 있다. / 정예지 기자




언론통폐합이 풀린 시기, 기자가 되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언론을 통제했다. 당시 9시 뉴스는 ‘땡전뉴스’라고 불렸다. 9시가 땡하면 ‘전두환 대통령은…’ 하고선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다 1988년 언론 통제가 풀렸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기. 당시 취업 준비생이던 서광식씨는 ‘자고 일어나면 신문사가 하나씩 생겨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해 그는 기자가 됐다.

2년 간의 기자 생활 후 정부간행물제작소로 이직했다. 그곳에서 정책을 알리는 국정신문을 만들었다. 어느 날 회사로 누군가 찾아와 “여기서 글 제일 잘 쓰는 애가 누구냐” 물었다. 사무실 여기저기 선후배의 입에서 그의 이름 ‘서광식’이 나왔다. 며칠 후 그가 불려 간 곳은 국무총리 공보관. 연설문을 쓰는 테스트가 주어졌다. 그가 쓴 연설문을 보고 면접관이 “난 이제 연필을 놔도 되겠다”고 말했다. 1996년 그는 스피치 라이터가 됐다. “골방에 앉아 밤낮없이 글을 만지면서 시절이 가고 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일에 푹 빠져 살았다.

21년간, 17명의 국무총리 거쳐

이수성 29대 국무총리 때부터 연설문을 썼다. 총 17명의 국무총리를 모셨다. “행정부 수장의 입장으로 쓰는 글이니 딱딱하고 공적인 글을 썼죠.” 총리마다 좋아하는 글의 스타일이 달랐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안 되듯이, 총리마다 스타일을 파악해 그와 어울리는 글을 썼다. “정부의 방침이 개인적인 신념과 괴리가 있어 괴로울 때도 있었죠. 하지만 내가 총리라면 어떤 식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늘 고민했어요."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면서 갑작스레 은퇴하게 됐다. 인생 2막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준비할 겨를도 없었다. 21년 동안 글 쓴 자칭 글쟁이인데 ‘넌 무슨 글을 써’하면 이젠 답할 게 없었다. 그는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 사회의 이방인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살아가니, 살 길이 보이더라”

퇴직한 지 2년 후,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의무적으로 갔다. 지자체 복지관에서 하는 노인맞춤돌봄서비스에 지원해 뽑혔다. 1인 노인가구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됐다. 그는 매일 남대문 쪽방촌에 출석해, 13명의 어르신을 돌본다. 그는 모범 활동가다. 매년 평가가 우수해야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데 그는 4년째 활동하고 있다. 서울50플러스센터에도 나갔다. 우연히 문학지 ‘에세이스트’를 발행하는 김종완 문학평론가의 수필 수업을 들었다. 그 인연을 계기로 은퇴 이후의 심정을 담은 ‘죽어도 죽지 마라’를 발표하고 수필가로 등단해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수필가가 됐다. 그 뒤에 에세이스트와 현대수필 등에서 청탁받아 작품 몇 편을 더 발표했다.



준비 못 한 은퇴였지만 결국 그가 꿈꿔왔던 일들을 하게 됐다. 살아가니 살아갈 길이 보였다. “은퇴를 기존 삶과의 단절이라고 생각했죠. 힘들었어요. 그런데 먼저 은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은퇴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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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서울 종로 본사에서 서광식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하고 있다. / 정예지 기자지난 21일 서울 종로 본사에서 서광식씨가 라이프점프와 인터뷰하고 있다. / 정예지 기자


글 쓰면 다른 세대를 이해하는 힘 생겨

그는 글을 잘 쓰기 위한 팁도 공유했다. “글을 쓰면 누구나 자기검열과 자기과시를 해요. 다른 사람이 볼 때 내 글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보여주고 싶은 욕구 때문에 포장하죠. 그런데 그런 포장과 과장은 걷어내고 솔직하게 써 내려가면 글이 자연스러워져요. 그런 글이 자기표현도 되고 세상을 위한 발언도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우선 잘 쓰인 글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글이 어떤 글인지 파악해 보라”고도 조언했다.

그는 즐거운 옆집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꼰대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는 중년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세대 공감’을 꼽았다. “글을 쓰면 자신도 보이고,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년들도 보여요.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생기죠. 요즘 세대 간 소통 부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글쓰기를 통해서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밥그릇 채우는 글쓰기에서 나를 말하는 글쓰기로

자녀에게 글쓰기를 강요하지도 않고, 글 쓰는 일을 티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시인의 꿈을 키우며 자습시간마다 몰래 시를 쓰던 걸 알게 됐다. 그 시들을 묶어두고 싶어 2011년 아들(서기웅 씨)과 부자(父子)시집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는 낙타’를 냈다. 아들이 아버지를 시에 담았다.

네 모서리가 다 닳아 없어진 책상 위에 낡은 펜 한자루가 놓여있다

작고 단단한, 삽자루 닮은 그것은 아버지의 연장이다

평생을 굳게 쥔 삽으로 종이를 파내 밥그릇을 채웠다

- 서기웅의 시 ‘펜’ 中에서

그는 예상못했던 퇴직으로 방황도 했지만 ‘밥그릇 채우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내 글을 쓰는 수필가됐다. 이제서야 ‘이렇게 살아도 되겠구나’하는 마음이 든다. 다른 중장년에게도 ‘은퇴는 끝이 아니더라’고 알려주고 싶다. 그의 필명은 서적(徐積)이다. 이제 하고 싶던 것을 하며 천천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쌓아나갈 것이다.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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