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여명]‘칩워’ 결말? 구(舊)소련에 힌트가 있다

■이철균 산업부장

기술·군사패권, 반도체 없이 유지 못해

과학강국 소련도 30년 싸움에서 무릎

동맹 日의 반도체 추월도 차갑게 진압

中 도전엔 복기하듯 긴싸움 서막 올려

이철균 산업부장이철균 산업부장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중 하나인 소련은 과학 강국이었다. 흡수된 나치 독일의 과학·엔지니어들의 영향이 컸다. 미사일·컴퓨터 등 기술력도 상당했다.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고 1961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배출했다. 이뿐인가. 유리 오소킨이 집적회로를 만든 것도 1962년이다. 군사력과 기술 패권을 반도체가 좌우한다는 것을 알았던 소련은 젤레노그라드(Zelenograd·녹색도시)를 착공하면서 꿈의 반도체 도시 건설에도 한발 다가섰다.



그랬던 소련은 30년 뒤 반도체 패권 다툼에서 사실상 완패했음을 시인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미국 실리콘밸리를 방문했고 미국의 첨단 기술을 넘겨받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평론가들은 미국의 완승을 확인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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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서 밀린다고 판단한 소련은 끊임없이 미국의 반도체 칩과 장비를 몰래 들여오고 베끼려 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원자재 준비와 가공·애칭·도핑·패키징 등에 필요한 2000개 안팎의 기계를 모두 갖추고 있었음에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는 실패했다. 반도체 공정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지식과 미세한 디테일까지는 베끼거나 훔칠 수 없었던 탓이다. 더욱이 무어의 법칙이 말하듯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24개월마다 2배씩 늘었다. 반도체에 집적하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2배로 늘어난다는 것인데, 베껴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속도였다. 소련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인텔의 칩을 모방했겠지만 그 기술이 늘 5년 정도 뒤처진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다.

소련의 집요한 야심에 놀란 미국은 동맹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 전략도 구사한다. 반도체의 효율적인 분업 체계인데, 미국은 칩 설계와 제조 장비, 조립의 역할을 이미 1960년대부터 나눴다. 단일국가가 설계부터 장비·조립까지 모두 갖춰 투자한다는 것은 1 대 100의 싸움과 같았다. 투자 규모는 물론 반도체 단계별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칩 스파이가 넘친다는 것을 인지했던 미국은 기술 통제도 치밀하게 한다. 소련은 무딘 반도체 장비에 순도가 떨어진 재료로 칩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으니 양국의 기술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이렇게 30~40년을 다투면서 소련을 ‘반도체’로 굴복시켰다.

소련 견제를 위해 일본에 반도체 조립 공장부터 기술까지 이전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돼 미국을 위협하는 데는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제 대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지만 미국 펜타곤을 자극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첨단 무기에는 첨단 반도체가 필요한데 일본 칩 의존도가 높아지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놓지 않고 있던 ‘군사 패권’의 지위마저 흔들릴 수 있었다. 반도체 패권은 곧 군사 패권의 보증수표였다. 심지어 패권을 가지려고 했던 일본이 정치적 득실에 따라 첨단 칩을 소련에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정밀 무기의 차이로 기울었던 미소의 군사력 균형이 다시 만들어지고 글로벌 질서는 또 체제 대립으로 갈 가능성이 커졌다. 미 정부는 1985년 미일 반도체협정, 1986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일본의 기세를 아주 냉정하게 꺾어버린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2위를 석권하던 일본의 기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삼성전자 등이 세계 반도체의 중심에 편입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미국은 지금 세 번째 칩워(Chip-War)를 벌이고 있다. 상대는 중국이다. 중국은 1960년 반도체연구기관을 출범시키고 1965년 중국산 집적회로도 만들었다. 잭 킬비가 1958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집적회로를 선보인 지 7년 후다. 중국은 소련·일본 못지않게 강한 상대다. 미국은 1·2차 칩워를 복기하듯 공급망부터 기술 통제, 초격차의 ‘승리’ 카드를 모두 꺼냈다. 누구 하나가 무릎 꿇을 때까지, 긴 싸움의 서막이 이제 올랐다.


이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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