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육조판서 가운데 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 격인 ‘호조판서’는 가장 단명하는 자리였다. 한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이다 보니 누구든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잔혹사를 깨고 영조 시절 무려 10년이나 자리를 지킨 이가 있었다. 바로 ‘정홍순’이다. 당대 최고의 재정관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훗날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지냈다.
정홍순은 ‘짠돌이 정승’으로 불릴 만큼 절약과 검소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집을 고친 천민 출신 수리공과 품삯을 두고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들은 “한 나라의 재상 체면에 어찌 천민과 다투시냐”며 “그러지 말고 품삯을 더 주자”고 했다. 그러자 정홍순은 “내가 인색한 게 아니라 한 나라의 재상이 품삯을 후하게 주는 것은 한 나라의 물가를 올리는 일”이라며 “그렇게 되면 가난한 백성들도 품삯을 더 내야 해 삶이 궁핍해진다”고 답했다. 나랏일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가 일반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늘 경계한 것이다.
갑자기 200년도 더 지난 옛날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현실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기재부가 13일 발표한 재정동향에 따르면 5월 기준 국가채무는 한 달 새 16조 원이나 불어 1100조 원에 육박했다. 나라 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52조 5000억 원 적자로 벌써 연간 전망치의 90%에 도달했다. 설상가상 부동산 거래 감소와 기업 실적 하락으로 세금이 덜 걷히면서 올해 40조 원의 세수 펑크까지 우려된다.
나라 곳간에 비상등이 켜졌지만 정작 이를 관리·감시해야 할 이들은 천하태평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나랏빚을 함부로 늘릴 수 없도록 하는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단 두 나라뿐이지만 재정준칙 도입은 3년째 국회에서 잠만 자고 있다. “해외의 재정준칙을 공부하겠다”며 유럽 출장까지 다녀온 여야 의원들은 세금만 축내고서 아무 말이 없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자립도는 50%를 밑돌지만 노인들의 해외여행과 젊은이들의 탈모 치료비를 세금으로 퍼주는 지자체들은 여전하다.
온 나라가 재정 중독에 취한 사이 국가 경쟁력은 뒷걸음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평가에서 올해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말레이시아에도 뒤진 28위였다. 특히 재정 부문(40위)은 1년 새 8계단이나 추락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돈 쓰기 경쟁이 불붙으면 나라 곳간은 빠르게 비어갈 수밖에 없다. 2023년 우리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정홍순’의 모습을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