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원조 수혜국이 공여국으로 탈바꿈했고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 명을 돌파한 30-50클럽의 일곱 번째 국가다. 정보기술(IT) 선진국, 문화 강국의 입지도 굳건하다.
그러면 보건의료 분야는 어떨까. 국가 보건의료 체계는 의료의 접근성·비용·질로 구성되는 ‘철의 삼각(iron triangle)’ 관점에서 평가되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병원의 문턱은 매우 낮다. 2020년 기준 우리 국민의 외래진료 일수는 14.9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민 의료비는 8.4%로 미국 19.9%의 절반 이하인데 OECD 평균인 9.7%보다 낮다. 출생아 1000명당 영아사망률 2.5명, 5년 암 생존률 71.5%, 기대수명 83.5세 등 의료질 관련 지표들도 양호하다.
그러나 준수한 우리 보건의료가 낡은 집이 돼가고 있다. 넘쳐나는 경증 환자 탓에 상급병원에서 중환자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의료 전달 체계가 붕괴하고 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넘쳐나는 반면 인근의 2차 병원 응급실은 텅 비는 의아한 상황도 속출한다. 소위 빅5 병원들은 이미 과밀화된 수도권에 분원을 늘리겠다며 열을 올린다. 이렇게 들어선 대형병원의 분원은 지방의 관록 있는 교수급 의사들을 끌어들여 지방의료를 고사시킨다. 급격한 고령화가 더해지며 의료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자랑스럽던 보건의료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느낌이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의 원인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세우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보건의료 공급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보는 것을 더는 늦출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필수의료 살리기와 건강보험 지속 가능성 제고를 보건의료의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걸고 개혁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의료 전달 체계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각 권역병원을 축으로 1~3차 병원의 의료 인력 간 원활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향후 네트워크를 포괄할 수 있는 수가도 개발할 예정이다.
둘째, 전공의에 의존하는 병원을 전문의 중심의 병원으로 바꿔나갈 것이다. 의사 증원이 선결돼야 하지만 10년이 넘게 걸린다. 증원된 인력이 새로 배출될 때까지 단계적이면서도 일관되게 병원 체질 개선 및 수련 체계 개편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 의료인의 근무 여건을 개선할 예정이다. 중증·응급·소아·분만 등 필수의료 분야의 수가를 개선하고 인력도 확충해 업무량을 줄여갈 계획이다. 사법 리스크 부담도 덜 수 있도록 의료분쟁조정제도와 환자에 대한 보상도 강화하겠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건보 재정의 누수를 줄이기 위한 개혁도 추진된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누구나 골든타임 내 적정한 필수의료 서비스를 받게 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보건의료의 기틀과 필수의료를 다시 세울 수 있도록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