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안 늦었죠? 오늘 색칠 놀이하기로 약속한 날이에요!”
14일 서울대어린이병원 1층에 자리 잡은 ‘꿈틀꽃씨쉼터’의 문이 열리자 조규리 양이 숨 가쁘게 뛰어 들어왔다. 꿈틀꽃씨는 중증 희귀 난치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아청소년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소아 완화 의료 프로그램이다.
“선생님도 같이 할래요?” 대학생 봉사단으로 참여하는 나누미 선생님과 함께 글라스 펜을 이용한 색칠 놀이에 열을 올리던 규리가 펜을 건네며 기자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규리는 여덟 살 무렵 유잉육종(ewing sarcoma) 진단을 받았다. 유잉육종은 뼈에 생기는 소아암 중 하나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소아 및 청소년 연령대에 생기는 악성종양 중 골육종 다음으로 흔한 유형이다.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시기에 항암 화학 요법과 조혈 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던 규리에게 꿈틀꽃씨는 병원에서 유일한 놀이터이자 아지트였다.
규리 엄마는 “입원 중 우연히 꿈틀꽃씨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참여한 후 매일 같이 쉼터에 내려왔다”며 “아이들에게 재미없고 두려운 병원이 즐거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꿈틀꽃씨 존재 자체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편의점이 있던 자리에 쉼터가 들어선 건 2015년 4월. 암이나 심장 질환, 대사 질환, 신경근육 질환 등 중증 희귀 난치병으로 오랜 기간 입원해 있거나 수시로 외래·응급실을 찾는 소아청소년 환자와 가족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마련된 공간은 어느덧 9년째 환자들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완화의료팀은 쉼터를 찾는 이들이 심리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한다. 동화 구연, 인형 극장 같이 영유아를 위한 이벤트 프로그램부터 청소년을 위한 일러스트, 핸드 드립 클래스, 보호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힐링 아로마, 공예 학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지난해 말 기준 꿈틀꽃씨를 이용한 환자는 3370명에 달한다. 환자 1명당 보호자 1명이 동반됐다고 가정하면 월평균 최소 686명이 이용한 셈이다.
격리가 필요하거나 거동이 어려워 쉼터에 방문하지 못하는 환자를 나누미 봉사자가 직접 찾아가는 병동 연결 프로그램도 인기가 많다. 최근 피부 통증이 심해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는 김세훈(8) 군은 보드게임을 한 아름 안고 병동을 찾은 나누미 선생님을 발견하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훈이는 다섯 살께 전신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전신경화증은 피부, 혈관, 내부 장기가 서서히 두꺼워지거나 딱딱해진다. “순서 먼저 정해야지, 입으로 가위바위보 할래.” 주먹을 쥐기 힘든 대신 목청껏 바위를 외치는 세훈이에게는 나누미 선생님과의 만남이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다.
언뜻 치료와 무관해 보이는 꿈틀꽃씨가 10년 가까이 운영되고 있는 건 수익성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을 내어준 병원 측 배려뿐 아니라 대학생 나누미 자원봉사자, 다양한 후원의 손길이 이어진 덕분이다. 꿈틀꽃씨는 어린이병원후원회를 비롯한 개인 및 단체의 후원, 유관 기관, 국가 등 다양한 지원금으로 운영된다.
현재 국내에서는 서울대병원 외에도 칠곡경북대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 등이 꿈틀꽃씨와 같은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18년 7월 보건복지부의 시범 사업을 계기로 소아청소년 완화 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은 총 11곳으로 늘었다. 최은화 서울대어린이병원장은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환을 앓는 소아청소년 환자의 치료뿐 아니라 삶에 집중하려면 완화 의료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며 “성장 발달과 함께 어려운 치료 과정을 거치는 아이들이 치료 외에 마땅한 권리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치료사·영적돌봄가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