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주전자 같은 라디오, 영양에 쫓기는 치타…뻔한 세상을 비틀다

김범 작가 첫 개인전 '바위가 되는법'

'임신한 망치·기도하는 통닭'

우스꽝스러우면서 의미심장

영상작품 '노란 비명 지르기'

'추상화는 쉽다'는 편견 부숴

리움미술관서 12월3일까지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전시 전경. 사진=연합뉴스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전시 전경. 사진=연합뉴스




전시관 초입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있다. 스크린 속에는 그 옛날 인기였던 ‘동물의 왕국’의 한 장면이 나온다. 치타와 영양. ‘아, 그렇구나~’하고 지나치면 안 된다. 한참을 들여다 보다 보면, ‘아, 그렇구나~'는 ‘아!’로 바뀐다. 치타가 영양을 잡으러 다니는 흔한 ‘클리셰'가 아니다. 이 영상 속에서는 영양이 쉴 새 없이 치타를 쫓아다니고 치타는 도망친다. 작가는 모두의 고정관념인 '약육강식이 당연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며 영상을 편집했다.



13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여는 김범(60) 작가의 ‘볼거리’다. 리움 미술관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다음 전시로 김범을 택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199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가 바로 김범”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김범은 낯설다. 상상을 초월한 재치와 압도적인 규모로 상반기 블록버스터 전시의 새 장을 연 ‘카텔란’의 다음 주자가 되기엔 아직 ‘잘 모르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전시 중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후략)’. 사진=연합뉴스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전시 중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후략)’. 사진=연합뉴스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중 ‘임신한 망치’. 사진=서지혜 기자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중 ‘임신한 망치’. 사진=서지혜 기자



하지만 결코 ‘아무 작가’는 아니다. 그는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지각이 근본적으로 의심되는 세계를 다루는 1990년 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개념미술 작가로, 광화문의 상징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고 김세중 조각가의 아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2010년 아트선재센터 전시를 끝으로 개인전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 역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신중하기 때문’이라고 리움 미술관 측은 설명했다. 전시를 하지 않은 것이 전시의 일부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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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럽게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작품이 많지만 무엇하나 생각할 거리가 없지는 않다. 망치의 배를 볼록 튀어나오게 제작한 ‘임신한 망치’는 ‘정말 임신한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모습이 생생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망치의 생산성을 아이를 ‘내놓는다’는 것에 빗대 ‘사물에도 생명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시장 곳곳에 등장하는 ‘통닭’ 역시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삐져나오지만 의미가 있다. 과거 전시에서 ‘잠자는 통닭’이라는 제목으로 통닭이 접시 위에 다소곳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작품으로 내놓았던 작가는 이번에는 ‘기도하는 통닭'이라는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제목을 읽고 나서야 ‘아, 통닭?’이라고 깨닫게 된다. 왜 통닭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기발한 상상이 깃든 작품을 볼수록 김범은 ‘잘 모르던 작가’에서 ‘더 알고 싶은 작가’가 된다.

김범, 노란비명 영상 중 일부. 사진제공=리움미술관김범, 노란비명 영상 중 일부. 사진제공=리움미술관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노란 비명 지르기’라는 영상 작품이다. 영상이 위치한 곳에 가기 전부터 멀리서 들려오는 ‘아아아악~’하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명 소리는 커져, 대체 저 암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커튼을 열고 들어서면 붓에 노란색 물감을 묻히고 ‘아아아악~’하고 소리치며 한 획씩 추상화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김범 작가의 영상이 나온다.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함부로 웃을 수는 없다. 이 공간에서 혼자 한참 ‘노란 비명 지르기’를 보고 있다 보면 작고한 작가 ‘밥 아저씨’가 떠오른다. ‘어때요, 참 쉽죠?’라고 말했던 밥 그로스는 늘 ‘어때요, 참 쉽죠?’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그의 그림을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는 한 획을 그릴 때마다 노란색의 의미를 말한다. 행복한 노랑, 슬픈 노랑, 고통스러운 노랑…그런 감정은 획과 비명에 담긴다. 획을 긋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감정을 담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추상화를 보고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 영화 같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바위가 되는 법’이다. 이는 작가의 책 ‘변신술(1997)’에 담긴 글의 제목 중 하나다. 사물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작가인 만큼 사람이 바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궁금증이 이어지는 전시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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