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8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통치 체제의 본질, 역사적 전개와 향후 비전 등을 논하는 토론의 장이 열렸다. 세미나에 모인 국내 석학들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다며 진정한 의미의 정치 공동체 육성과 같은 변화가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정치·외교·사회 등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비영리단체 ‘더플랫폼’은 10일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서울풀만호텔에서 ‘8·15 광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특별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는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해 축사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지낸 송상현 더플랫폼 이사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이 좌장을 맡아 토론을 이끌었다.
현병철 더플랫폼 회장은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인권을 존중하며 법에 의한 지배를 제도화하는 가장 값진 공론의 장치지만 오늘날 세계는 포퓰리즘·권위주의·양극화 등을 부추기는 세력에 의해 혼란을 겪고 있다”며 세미나의 취지를 설명했다. 박 장관은 기조연설에서 한국이 광복 후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 성취를 언급하며 “그 성공은 세계사적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고 강조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석학들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공론 기능의 해체 등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진단을 앞다퉈 내놓았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위기’라는 발제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나 삼권분립 같은 자유주의 제도를 공격해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허무는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며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의 세계적 확산이 그 증거”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한국의 시민사회는 권력에 의해 포획되고 특정 진영과 일체화하면서 치명적인 신뢰 위기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박찬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역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질적 수준으로는 주변적 위치에 있다”며 “스웨덴과 같은 최상위급 자유민주주의 반열에 들게 되는 발전의 행로를 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되려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질적 수준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받았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은 그동안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규칙 기반 질서에서 빠르게 성장해왔지만 이제는 예전과 국제적 위상이 달라졌다”며 “앞으로 변화하는 자유주의적 국가 질서에서는 미국과 모든 이익과 시각이 일치할 수 없으며 국제 질서의 변곡점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전개와 과제’라는 발제를 통해 한국이 더 나은 자유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정한 정치 공동체의 시민 육성과 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45년 광복 이후 제기된 국가 정체성 논의와 건국 헌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