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5년 넘게 이어진 한미 간 ‘세탁기 전쟁’에서 일단 전략 실패를 인정했지만 국내 기업들은 오히려 셈법이 더 복잡해졌다고 호소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ITC의 관세 폭탄에도 세탁기 시장점유율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공장 이전을 통한 발 빠른 현지화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현지 공장 이전이 없었다면 그대로 세계 최대의 시장을 놓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16일 “표면적으로 보면 점유율을 높인 삼성과 LG가 전투에서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찌 됐든 자국 내 투자와 고용을 늘린 미국 정부가 전쟁에서 승리한 셈”이라며 “조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내세우면서 자국에 대한 투자를 늘리라는 우회적 압박의 강도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중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도 우리 기업의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과거에는 미국 시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단행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 돈을 묻어야 하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은 미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글로벌 기업의 대(對)중국 투자를 제한하고 각종 영업기밀을 강제 제출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서 받는 보조금이 ‘독이 든 사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보조금을 받지 않아 미국이 재편하는 질서에서 벗어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우리 기업들이 최근 미국 투자를 늘리는 배경에는 지정학적 요인도 포함돼 있다는 뜻이다.
실제 최근 국내 기업들은 앞다퉈 미국 투자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3조 원)를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현대차그룹도 조지아주에서 내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첫 전기차 전용 공장을 세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역시 배터리를 공급하기 위해 전기차 공장 인근에 각자 배터리 합작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올해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2위에 오른 현대차그룹은 현지화를 통해 1위 기업인 테슬라를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제너럴모터스(GM)는 LG에너지솔루션과 벌써 세 번째 합작공장을 설립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삼성SDI와의 새로운 합작 투자를 결정했다. 포드는 SK온과 손잡고 테네시·켄터키주에 배터리 공장을 세우는 중이며 스텔란티스는 LG에너지솔루션과는 캐나다에, 삼성SDI와는 미국에 생산 거점을 구축하기로 했다. K배터리의 잇따른 현지 투자에 발맞춰 LG화학·포스코퓨처엠·에코프로비엠 등 국내 배터리 소재 업체들도 북미에서 현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완성차 업계도 북미 전기차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한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혼다와 LG에너지솔루션은 오하이오주 배터리 합작공장을 2025년 가동할 예정이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 시장으로 쏟아져 나가면서 우리 정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우리 기업들의 리쇼어링(국내 복귀)이 지난해 기준 22건에 그친 반면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대기업의 해외투자는 도리어 늘고 있어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서다. 우리 기업들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닌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품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해봐야 국내 일자리나 경제성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고민이다.
국내 한 대기업의 대관 담당 임원은 “그나마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들이 첨단 공정 라인을 해외에 내놓지 않고 있어 전후방 산업의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다”며 “글로벌 수준의 세금 혜택이나 지원금을 줄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