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을 보고 귀국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을 때 독일에서는 '먹을것도 없는 나라가 고속도로를 만드냐'고 웃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과학기술계와 스타트업의 유럽 진출을 위한 고속도로 역할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연구소가 하겠습니다."
김수현 KIST 유럽연구소장은 16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열린 ‘한국-유럽 과학기술학술대회(EKC) 2023’ 행사장에서 한국과학기자협회 공동취재단과 인터뷰를 갖고 "세계에서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될수록 오히려 네트워킹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면서 "과학기술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이같이 강조했다. 1996년 설립돼 올해로 27주년을 맞은 KIST 유럽연구소는 국내 유일의 해외 소재 정부 출연연구소다. 프라운호퍼와 막스플랑크를 포함해 16개의 연구 기관이 입주해 있는 독일 잘란트주 자르브뤼켄시 내 잘란트대학 연구개발(R&D) 클러스터에 위치해있다.
김 소장은 "KIST 유럽연소는 아직 한국 과학기술이 해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시기에 글로벌 연구개발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결단으로 세운 곳"이라며 "오래전의 선견지명이 지금 하나둘 씩 꽃을 피우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IBK기업은행과 독일 잘란트 주 경제진흥공사와 함께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하는 국내 스타트업 유럽 진출 프로그램이다. 별도의 심사과정을 거쳐 선발된 15개의 스타트업이 내달 중 독일로 향한다. 이 중 5개 기업이 최종 선정돼 본격 유럽 스타트업 설립 절차를 밟게 될 예정이다. 그는 "현지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유럽 기관들과 오래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KIST 유럽연구소가 자연스럽게 유럽 현지에 녹아들었고, 이러한 활동이 한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됐다고 본다"며 “그 덕에 국내 스타트업 진출 과정에서 잘란트주 경제진흥공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국 기업들이 독일 현지에 진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소식이 지역에 퍼지자 현지 기업들의 문의도 이어졌다. 김 소장은 "최근 몇몇 독일 기업이 역으로 우리가 너희를 통해 한국에 진출할 수 있겠냐'고 연락을 해 왔다"면서 "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 국제협력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미 인프라를 구축해 놓은 덕에 이를 잘 활용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최근 유럽의 한류 열풍이 'K R&D'를 유럽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KIST 유럽연구소가 위치한 자르브뤼켄은 인구가 20만 명인 작은 도시인데도 한국어 강좌가 4개나 개설됐다"며 "방탄소년단(BTS)과 한국 드라마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구 협력은 물론 기업 진출의 물꼬를 트기도 몰라보게 쉬워졌다"고 언급했다.
2년 7개월 간 KIST 유럽연구소를 이끌어 온 김 소장은 독일의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langsam, aber, sicher)라는 표현을 언급하며 "일이 늦어져 불편하더라도 완벽하게 해 뒤탈이 없게 하는 독일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말이고 독일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배터리 등의 첨단 기술에서 뒤쳐진 데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독일이 협업하는 과정을 거치며 두 국가의 성향을 합쳐 '빨리빨리, 그러나 확실하게' 기술주권을 확보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뮌헨(독일)=한국과학기자협회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