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편안해야 할, 가장 변화가 없어야 할 공간인 집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것 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영화 ‘잠’은 일상적 소재인 집과 침대, 수면을 공포의 소재로 영리하게 바꾸며 관객들을 불안과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수면 장애, 혹은 몽유병을 소재로 진행된다. 남편 현수(이선균)는 잠을 자며 피가 날 때까지 볼을 긁는 것도 모자라, 냉장고를 열고 생고기와 날생선을 먹는 이상 행동을 보인다. 아내 수진(정유미)은 만삭의 임산부임에도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원래대로 돌려놓고자 한다.극은 그 속에서 점점 더 거칠어지는 현수의 행동과 수진의 심경 변화를 조명하며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이번이 첫 장편 데뷔인 유재선 감독은 거장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다. ‘봉테일’이라 불릴 만큼 디테일에 강한 봉 감독과 일해 온 만큼 그의 영화에도 깨알 같은 디테일과 미장센이 가득하다. 3장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각종 상징과 복선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몇몇 장면은 ‘기생출’ ‘마더’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봉 감독은 “최근 10년 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정유미는 “이런 간결하고 깔끔한 대본과 연출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극을 이끌어가는 이선균과 정유미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두 배우는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호흡이다.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에서 함께 연기했던 그들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신혼부부 역할을 어색함 없이 소화해 낸다. 특히 정유미는 공포를 겪으며 변해 가는 아내의 모습을 연기하며 완벽히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정유미는 “더 광기 있는 연기를 했어야 하지 않나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웃었다. 이어 “빈 부분은 이선균이 다 채워 줬다”며 “편안하게 연기 호흡을 맞췄다”고 전했다.
결말은 관객의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어느 해석이라도 뒤돌아 생각해보면 오싹하기는 마찬가지다. 유 감독은 앞서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며 “봉준호 감독께서 해석을 말하지 말라고 조언해 줬다”고 말했다.
영화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대돼 호평받았고, 제56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와 제48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동양적인 무속의 요소를 제대로 그려내 다른 문화적 코드를 보여주며 해외 관객들의 예상치 못한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평단에서는 영화 흥행이 양극화되고 몇몇 유명 감독들의 작품도 부진을 겪고 있는 지금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의 등장에 기대가 커지는 분위기다. 정유미는 “새로운 감독님들이 좋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의미가 있다”며 “다시 극장 문도 열렸으니 관객들이 찾아와주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달 6일 개봉. 9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