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모범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가 최근 이민정책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의 이민 강경 기조에 연립정부 내에서 갈등이 터져 나왔고 뤼터 총리가 이를 봉합하지 못하고 결국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급격한 난민 유입 이후 싹튼 반(反)이민 정서를 공략하기 위해 숙의 없이 이민정책을 펼치려 한 대가라는 지적이다.
30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1월 22일 총선거를 치른다. 뤼터 총리가 이끌어 온 네덜란드 연립정부가 7월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데 따른 선거다. 이미 뤼터 총리는 “총선 이후 새 연정이 출범하면 정계를 떠나겠다”며 은퇴를 예고했다. 2010년 10월부터 13년간 이어져 온 ‘뤼터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네덜란드 최장수 총리인 뤼터 총리는 유럽 재정위기(2010년대 초), 코로나19 대유행(2020년) 등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미스터 노멀(Mr. Normal)’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뤼터 총리의 친정인 자유민주당(VVD)과 진보 성향 D66, 중도 우파 성향 기독민주당, 기독교연합당 등 4개의 정당으로 구성된 현 연정을 유지시킨 장본인이다.
이런 뤼터 총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난민·이주자 수용을 둘러싼 내홍이다. 뤼터 총리가 난민 가족의 입국을 월 최대 200명으로 제한하고 이들이 가족을 데려 오려고 할 경우 최소 2년을 기다리게 하자는 의견을 밝히자 연정 내 진보 성향 정당들은 “반인륜적”이라며 강력 반발, 결국 의견 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외신은 네덜란드 정계가 이민 문제로 분열된 사실이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지난 40여 년간 네덜란드는 이민자 수용·통합 정책을 촘촘하게 펼쳐 ‘이민 모범국’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경제 호황으로 터키·모로코 등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 이들 중 상당수가 네덜란드에 정착하자 네덜란드 정계에서는 이주자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1980년대 네덜란드는 이주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 목표를 세웠다. 1985년 이민자에게 지방자치단체 선거권을 준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1990년대에는 이민자의 사회·경제적 평등 보장을 목표로 삼고 이들의 실업 및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마련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디애틀랜틱은 “네덜란드는 이민자를 관리가 아닌 진정한 통합의 대상으로 보는 나라”라며 “이런 나라에서 이민 갈등으로 연정이 무너진 것이 놀랍다”고 평가했다.
네덜란드 안팎에서는 이민정책이 정치적 셈법에 좌우되기 시작한 게 갈등의 시발점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크 클라센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국가 이민정책이 정치적 이점을 얻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이민자를 대하는 과거 뤼터의 태도는 지금과는 달랐다”며 “반(反)난민 정서가 확산하고 있는 유럽 사회와 네덜란드 여론을 의식해 이민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으로 급선회했다”고 평가했다. 경기 둔화 속 사회복지 비용 지출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시리아·우크라이나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며 반이민 정서가 싹텄고 뤼터 총리가 이를 공략하기 위해 숙고, 협의 없이 이민정책을 펼치려고 했다는 의미다.
반이민 정서 확산에 정부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정적으로 이민자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유입 예측을 기반으로 한 수용 대책(주택 마련 등)도 마련돼야 한다. 그런데 이민자를 일단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네덜란드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사람은 3만 5535명으로 전년 대비 44% 늘었다. 2015년 이후 최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