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미술 시장을 상징하는 장르는 단연 ‘단색화’다. 이우환, 박서보 등으로 대표되는 단색화의 큰 특징은 붓으로 찍어 내린 듯한 큰 획이다. 단색화는 마치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묵화에 채색을 입힌듯 지조와 품격을 드러낸다. 최근 한국 단색화 시장의 또 다른 특징을 꼽으라면 ‘작가의 성별’이다. 한국 단색화를 주름잡는 작가는 대부분 남성이다. 수묵화를 그린 이들이 대개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단색화 작품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술 시장에서는 반대로 ‘채색화·여성화가’로 눈을 돌리는 흐름도 감지된다. 선화랑이 기획한 ‘풍경들 사이를 소요하는 즐거움: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는 ‘여성화가’와 ‘채색화’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면서 한국 미술계가 주목해야 할 세대별 작품을 두루 조명하는 독특한 전시다. 전시에는 1940년대생 이숙자부터 김인옥, 유혜경, 이영지, 이진주, 김민주의 작품을 건물 전층에 전시한다.
전시관 2층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이숙자의 ‘보리밭’ 작품 2점이다. 이숙자는 한국 대표 여성 채색화가인 천경자의 홍익대 제자로 50년 이상 채색 작업만을 진행하며 채색화 명맥을 이어온 대표 여성 작가다. 시장이 단색화의 대안으로 채색화를 발견한 것도 이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보인 ‘청보리 벌판’은 사립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전시임에도 판매는 하지 않는다. 작가는 여전히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중이다. 작품 위에 정성 들여 얹은 보리알 때문이다. 전시를 주최한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전시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보리알을 한 톨씩 쌓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며 작품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이숙자, 김인옥이 한국 여성 채색화의 오늘이라면 유혜경, 김민주, 이영지, 이진주 등 3040 작가들은 한국 여성 채색화의 미래다. 각 세대의 채색화에 대한 관점이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이숙자나 김인옥처럼 1960~7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는 채색화를 수묵화의 상대개념으로 받아들이며 전통 채색화의 재료와 기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왜색’이라며 폄훼 받던 채색화의 명맥을 잇는 데도 기여한 셈이다.
반면 2000년 대에 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들은 채색화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에 다른 매체보다 더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전통적인 채색 안료를 선택한다. 가장 젊은 작가인 김민주는 과슈, 아크릴물감 등 전통안료가 아닌 다양한 표현 재료를 사용하며 채색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진주는 전통 안료에 아크릴 물감을 혼합해 자신만의 고유한 수제 물감인 ‘검은색(JBblack)’을 제조해 사용하는 대담한 표현을 선보이기도 한다.
채색화에 대한 관심은 하반기에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9월 ‘키아프 2023’에서 한국 전통 채색화의 대표 주자인 ‘박생광·박래현’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다. 전시 기획은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