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침공으로 전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5일 의회에서 통과된 ‘9534호 법안’으로 큰 소동을 겪었다. ‘계엄령 중 국가·지방자치단체 공직자의 자산 신고 절차에 관한 법 개정안’으로 명명된 법안에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보안상 이유로 중단된 공직자 자산 신고를 다시 시작하되 해당 내역은 신고 이후 1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담겼다. 이 조항은 공직자의 부패를 감싸는 조치로 비쳐 거센 반발을 불렀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법안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는 국민 청원에 서명한 인원이 1주일 만인 12일 현재 8만 3854명에 달해 청원 심의 요건인 2만 5000명을 크게 넘어섰다.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텔레그램에는 “거부권 행사 이유는 분명하다. 신고 내역은 1년 후가 아니라 당장 완전히 공개돼야 한다”고 이유도 밝혔다.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이자 최근에는 각종 부패 의혹으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서방의 지원을 계속 받아야 하고 유럽연합(EU) 가입도 추진해야 하는 우크라이나 정부로서는 다른 길이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56억 달러(약 20조 7000억 원)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 제공을 위한 조건으로 공직자 자산 신고 의무 복원을 요구해왔다.
젤렌스키의 결단은 환영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반부패 운동가인 비탈리 샤부닌은 “우크라이나 사회의 승리”라고 평가했고 비정부 기구인 반부패행동센터는 “이번 사례는 대통령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던 일”이라고 밝혔다. 반면 우리 국회는 여야가 작당해 국회의원 가상자산 전수조사 대상에서 배우자 등 가족을 쏙 빼 지탄을 받고 있다. 양곡관리법·간호법 등 거대 야당의 계속되는 ‘거부권 유발’ 입법 폭주에 대해서도 국민의 실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내년 4월 총선 때 역풍을 맞지 않으려면 정치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