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191억 원을 부과받았다. 부품 생산과 선적을 중단하며 삼성전자를 협박해 자사 제품에 대한 장기구매계약(LTA)을 강요했다는 이유에서다. 브로드컴 행위의 위법성이 공식 확인된 것으로 추후 삼성이 손해보상 청구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21일 공정위는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삼성에 LTA 체결을 강제한 브로드컴에 시정 명령과 과징금 191억 원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삼성과 브로드컴은 2020년 3월 LTA를 맺었다. 삼성이 2021년부터 3년간 매년 최소 7억 6000만 달러의 브로드컴 부품을 구매하고 이에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한다는 내용이다. 공정위는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가진 브로드컴이 LTA 체결 전 부품 생산 및 선적을 중단하며 삼성에 계약을 강요했고 계약을 맺자 즉시 관련 조치를 해제했다”며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거래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입히고 시장 경쟁을 제한했다”고 판단했다.
사건의 주요 쟁점은 △브로드컴이 거래상 지위가 있는지 △LTA가 삼성에 일방적으로 불리했는지 △LTA 체결에 따른 피해가 명확한지 등이었다. 브로드컴은 글로벌 기업인 삼성이 거래상 열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시장에서 LTA를 통해 삼성은 안정적으로 부품을 조달했으며 LTA 체결로 삼성이 입은 피해를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세 가지 쟁점 모두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먼저 브로드컴에 대한 삼성의 의존도가 최대 99.4%에 달해 거래상 지위가 있다고 봤다. 또 브로드컴이 삼성에 취한 조치를 스스로 ‘폭탄 투하’ ‘핵폭탄’에 비유하며 삼성에 심각한 피해가 가해질 것을 인지했었다는 점에서 LTA가 상호 호혜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LTA 체결로 삼성은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억지로 8억 달러의 부품을 구매했다며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고 봤다.
일각에서의 ‘과징금 규모가 너무 작은 게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공정위는 제도상 가능한 최대 과징금을 부과했다는 입장이다. 한기정(사진) 공정거래위원장은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과징금은 관련 매출액에 부과 기준율(현재 4%·사건 당시 2%)을 곱해 산정한다”며 “삼성이 LTA 이행을 위해 구매한 금액이 매출액에 모두 반영됐고 부과 기준율도 상한 2%를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공정위의 조사 착수 이후인 2021년 8월 LTA가 조기에 종료되며 과징금 규모는 200억 원에 못 미쳤다.
공정위 제재가 브로드컴이 마련한 자진 시정안(동의 의결안) 내용에도 못 미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 의결과 정식 사건 처리는 기본적으로 취지와 요건이 달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동의 의결은 기업이 자진 시정안을 내며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절차다. 지난해 7월 브로드컴은 동의 의결을 신청, 인력 양성 및 반도체 생태계 지원을 위한 200억 원 규모의 기금 조성 등을 약속하며 사건 종료를 요청했지만 공정위는 최종적으로 기각한 바 있다.
향후 브로드컴은 과징금 부과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 역시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공산이 크다.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위가 브로드컴의 위법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삼성이 추후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